[꼬문생각] 정후
최근 켄 로치의 〈나의 올드 오크〉 (The Old Oak, 2023)가 개봉했다. 그의 은퇴 번복 이후 나올 아마도? 마지막 영화이므로 그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라는 영국 복지 제도의 문제에 대해서 쓴 작품이었다. 오아시스와 블러의 브릿팝 전쟁을 통해 영국의 계급성에 대해 미약하게, 그리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나에게 다큐멘터리와 같은 그의 영화가 보여준 충격은 엄청났다. 조지 오웰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 (The Road to Wigan Pier, 1936)에서 썼듯이 영국의 중산층과 상류층은 노동계급의 ‘터프함’을 동경하면서도 막상 그들이 겪는 삶의 어려움은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문화를 그 문화가 만들어진 배경은 무시한 채 향유하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나에게 진정으로 노동계급의 현실에 가까운 면들을 보여주었다.
이번 영화는 망해가는 뉴캐슬의 한 펍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의 주민들은 과거 파업의 기억을 갖고 있고,, 스스로 광부 출신 혹은 광부의 집에서 자랐다는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들의 계급적 색깔은 옅어졌다. 동네는 더 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니게 됐다. 투기꾼들은 집을 샀고, 시리아 내전을 피해 영국으로 온 난민들이 머물렀다. 켄 로치는 항상 노동계급의 현실을 담아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노동 계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찍을 대상이 없으니 이제 영화 감독으로서 그의 존재가치도 무색해진 듯하다. 영국의 보수화가 심해져서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그이지만, 이번 은퇴 이후로 영국이 더 보수화된다고 하더라도, 그가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영화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영화의 분위기는 이전과 다르다. 켄 로치는 이전 영화들, 특히 초기작에서 현실의 암울함을 담으면서도, 노동계급만의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힘마저 상실한 암울한 상태를 담아낸다. 1984년, 대처 정권의 탄광 폐쇄에 맞선 대규모 파업도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한 채로 끝나 버려졌다. 노동계급은 하층민과의 특성적 구분이 불가능해지고 있다. 노동계급은 동시에 여러 일을 하고, 일급을 받더라도 고정된 직장이 있고, 그들만의 문화(락, 축구 등)을 매개로 뭉치는 힘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는 직장도 잃은 실업자 신세에, 음악이나 스포츠를 즐기기에는 돈이 없고, 문화도 다른 계급에게 빼앗긴 상태다. 간판이 고장났지만 수리할 돈조차 없는 올드 오크 펍처럼, 노동계급은 소생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노동계급은 이제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아닌, 본인보다 취약한 이들을 공격한다. 영화 속 노동계급은 시리아 이주노동자들이 본인들로부터 얼마 남지 않은 공간을 뺏어가고, 정부의 지원이나 구호 물품들을 독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장면들은 노동계급의 보수화를 담은 것으로, 다른 집단과 연대할 여력조차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영화는 노동계급과 시리아 이주민간의 오해가 풀리고 서로가 연대하며 끝난다. 그의 영화답지 않게 꽤 낭만적인 결말이다. 항상 주인공이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나던 영화와는 전혀 달리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대한 기대로 이런 결말을 내렸다기보다는,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관객들에게 현실을 인식하고 바꾸라는 메시지를 던지기를 포기했다고 보인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던 노동계급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바래버린 그의 영화는 한때 생명력이 강했던, 그리고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그런 집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자신이 영화로 찍을 소재 즉,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켄 로치라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 숨쉬겠지만, 켄 로치라는 영화 감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후 | vlaestra@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