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편집위원 정후
- 한국 힙합이 만든 허구의 적은 무엇이었는가-
글에 나오는 곡들을 모아 놓은 플레이리스트이다.
힙합 위기론은 2020년대부터 시작된 이야기이다. 〈쇼미더머니 11〉 (2022)을 끝으로 프로그램 제작이 중지되었고, 차트에서 힙합 음악을 찾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나는 힙합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 꽤나 확신하고 있다. 힙합은 신자유주의와 운명을 함께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힙합은 형식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주제적으로도 특징적이다. 먼저 형식상의 특징으로 샘플링 기법[2] 이 있는데, 이를 쓴다는 것은 하나의 음악이 완결되지 못한 채 샘플링을 하는 주체의 의도대로 재가공됨을 의미한다. 이는 『포에버리즘』 (Foreverism)에서 그래프턴 테너가 ‘영원한 베타테스트’로 표현하는 맥락과 연결된다. 샘플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샘플링한 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큰 혁신 없이 업데이트만 하는 현대의 기술적 ‘개선’ 문화와 비슷하다. 생산자는 뭔가 변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혁신이 아니다.[3] 힙합은 샘플링을 통해 다른 장르들을 모두 흡수해서 새롭게 보이는 ‘척’을 한다. 실상은 다른 장르의 사운드를 빌려 오는 것에 그치기에 스스로 혁신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낼 힘을 잃는 것에 불과하다.
또 다른 형식상의 특징으로는 라임{Rhyme}이 있다. 힙합에서 사용되는 욕설들은 큰 의도 없이 쓰이는 경우가 많다. 욕은 발음이 강하고 쉬운 경우가 많기에, 추임새에 라임을 끝없이 맞춰야 하는 힙합 특성상, 이미 검증된 단어인 욕설을 집어넣는 것은 안전한 선택이 될 수 있다.
힙합의 정서적 특징은 '적당히 반항적'이라는 것인데, 힙합의 분노가 사회 구조로 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힙합만큼 신자유주의적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 장르도 없다. 고난-성공 서사를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성공한 자신의 '허슬'[4]을 강조하며 빡세게 살지 않는 남들을 무시하는 점, 돈⋅여자⋅차로 대표되는 물질적 성공을 강조한다는 점 등이 그 신자유주의적 특성이다. 그리고 힙합의 분노는, 이를 통해 사회에서 규정한 성공을 이뤄내 정상성에 들어가겠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비록 주변부에서 시작했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중심부로 들어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노른자위로 이동하려는 열망 속에서 체제와 같은 거시적인 것에 대한 검토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힙합의 주제 또한 상상력이 부족하다. 리얼리즘적 특성에 충실하지만 체제의 비판점을 모색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미시적으로 자신의 부족한 점, 그리고 어떻게 나아갔는지에 대해 서술하는 일종의 '자기계발서적 신화'를 쓴다. 게다가 선배들을 존경하며 그 선배들을 따라가려고 한다.
공동체에 대한 강한 집착도 힙합의 특성이다. 갱{Gang} 문화에서 시작했기에 서로 레이블을 차리고, 친한 사람들끼리 샤라웃을 해주고, 피처링을 해주는, 일종의 가내 수공업적인 특성을 여전히 지닌다. 특히 레이블들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지속된다는 것을 보았을 때 힙합은 각 아티스트들이 혼자서 살아남는 문화는 아니다. 디스전이 시작되면 친한 사람들끼리 서로 편을 들어주는 것만 봐도 그렇다. 친구에게 '호미{Homie}'와 같은 별칭을 붙이며 관계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또 성공 후에 본인이 살았던 슬럼가인 후드{Hood}를 방문하며 고향 사람들을 챙기는 문화가 남아있는 것도 그러하다.
흑인 커뮤니티에서 자란 사람들의 서사 구조는 IMF 이전 한국이 고도의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었을 때 성공한 이들과 유사하다. 작고 열악한 지역사회에서 한 명이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고 사법고시에 통과하면 온 지역 사회가 축하하는 자랑거리가 되고, 경력을 쌓은 이후 정치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지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 지역에 영향을 행사함으로써 다시 본인이 영향력을 얻고, 같은 동향 사람을 챙기며 그 영향력을 유지하는 구조를 띠고 있다. 한국에서 후드와 같은 지역사회 커뮤니티에서 자란 이들, 혹은 후드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사라졌다. 그러나 실제 사례들이 사라졌어도 이런 이야기들은 일종의 신화가 되어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기존의 성공 잣대와 그것을 이루는 방식을 답습하는 것에 대한 의심을 없앤다.
힙합은 신자유주의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음악이다. (기존의 것을 조합해서 새로워 보이게 만듦이 대안을 상상하지 못하는 빈곤한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것,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신자유주의 질서 유지에 기여한다.
장르 음악에서 ‘진정성’이라는 개념은 팝 음악과 달리 수용자가 창작물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얼마나 ‘락’인지, ‘펑크’인지, ‘힙합’인지가 작품의 평가와 직결되곤 한다. 미국에서 흑인이 힙합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출신 지역과 흑인이라는 인종은 곧 진정성의 증표가 된다. 여기에 자신이 성공한 방식에 대해 말한다면, 그들의 힙합은 그 자체로 ‘리얼’하다. 하지만 ‘게토도 없는’ 한국의 힙합은 다르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힙합이 가능한지, 한국만의 힙합이 존재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이 제기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한국 힙합이 호소한 진정성은 무엇이고, 왜 그것이 허상에 그쳤는지, 그리고 한국의 힙합도 망하지 않을 수 있을지 알아보고자 한다.
힙합이 진정성을 어필하는 방식은 ‘적’을 만드는 것이다. 본토의 경우 가난, 경찰, 인종차별 등 소외된 계층인 자신을 가로막는 구조적 차별에 기반해서 적을 만들고 이들을 이겨내서 성공한 자신을 ‘진정한 승자’로 규정한다.
국내 힙합의 초창기에 대중들에게 진정성을 어필하기 위해 만들었던 적은 ‘자본’이었다. ‘마이너’한 음악을 자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지킨다는 점이었다. 이는 90년대에 남아있던 반-체제 움직임, 해외의 문화를 수입할 수 있게 된 기술적 발전, 그리고 홍대 거리의 부상과 함께 적당히 반항성을 띠는 ‘힙스터’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힙합은 중산층 청년들이 소비하기 좋은 문화였다. 반항적이지만 동시에 감성적인 가사들을 들으며 현재의 고난을 극복한 후 물질적인 보상을 얻는 서사는 아니더라도, 고난을 이겨낸 후 정서적으로 성장하고, 진정한 ‘나’를 지켜내는 내용을 담은 가사의 (〈진흙 속에 피는 꽃〉 (2007), 〈상자 속 젊음〉 (2005) 같은 곡들) 유행이 당시 청년의 허망함을 위로해 주었다.
사회 비판적이지만 체제의 전복을 꾀하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지키는 내용의 가사들이 90년대부터 00년대 힙합의 정체성이었다면, 2010년대에 들어서며 〈쇼미더머니〉라는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힙합의 정체성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다.
〈쇼미더머니〉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프로그램이다. 관객들의 투표 점수도 모두 돈으로 환산되고, 더 많은 돈을 얻은 이가 경연에서 승리한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힙합의 주류 담론으로 떠오르던 돈 자랑 문화를 증폭시켰다. 힙합을 이끌던 소울컴퍼니라는 레이블이 사라지고, 힙합의 본토인 미국에서 랩의 색깔이 변하며 국내 힙합이 혼란기를 겪는 동안 대기업인 CJ의 압도적인 자본과 영향력을 등에 업은 〈쇼미더머니〉는 국내 힙합을 장악했다.
일리네어 레코즈가 〈11:11〉 (2014)이라는 앨범을 2014년에 발매하며 전면으로 내세운 ‘머니 스웩’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주로 돈을 번 마약상 이야기를 하는 ‘트랩’이라는 장르가 국내 힙합의 주류가 되었다. 이 장르는 ‘붐뱁’과 달리 메시지보다는 사운드적 쾌감에 초점을 둔다. 돈에 초점을 맞춘 트랩 음악들과 〈쇼미더머니〉는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스윙스가 〈쇼미더머니 2〉 (2013)에 등장한 이후로 힙합에서 정체성에 대한 문제들이 제시되기 시작한다. 이전 한국 힙합에서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가 협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언더와 오버는 완전히 구분되는 두 부류였다. 언더는 랩 스킬을, 오버는 대중성을 평가의 척도로 삼았고, 그들의 무대도 홍대 클럽과 지상파로 명확히 나뉘어 있었다. 또한, 언더에서 성공해서 오버로 가야겠다는 목표를 지닌 래퍼는 드물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매년 진행될수록, 점점 〈쇼미더머니〉 출연을 기준으로 언더와 오버를 구분하는 인식이 생겼다. 대중들이 래퍼를 판단할 때 〈쇼미더머니〉에 출연하지 않았으면 언더그라운드 래퍼로, 출연했으면 오버그라운드 래퍼로 판단하게 된 것이다. 언더에서 활동하던 래퍼가 〈쇼미더머니〉 출연을 통해 인지도가 상승하면 오버로 ‘등단’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일어나며 〈쇼미더머니〉는 ‘힙합 고시’, ‘힙합 수학능력시험’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이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스윙스가 〈쇼미더머니 2〉 4차 공연에서 〈Raw〉 (2013)라는 곡에서 자존심 때문에 〈쇼미더머니〉에 안 나오는 래퍼들을 비판하며 “그럼 서른 초반에 엄마 집에 얹혀사는 인생은 자랑스러운 거냐?”라는 가사를 내뱉으며 시작된다. 프로그램을 통해 스윙스는 인기를 얻었고, 이후 과연 ‘힙합에서의 성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시작됐다. 성공이 사회에 저항하며 힙합이라는 문화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것인지,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서 성공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 답이 없는 문제에 많은 래퍼들이 의견을 표명했고, 또 문화의 순수성을 지키는 게 성공이라고 했다가 이젠 생각이 변했다며 〈쇼미더머니〉에 출연하는 래퍼들 때문에 ‘노선 바꾼 뱀 새X 논란’이 힙합의 담론을 지배했다.
한국에서 무엇이 ‘힙합’인가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힙합은 너무 급속히 성장했다. 더 큰 문제점은 ‘힙합다움’이 일종의 셀링 포인트라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의 혼란에 XXX는 〈Second Language〉 (2019)의 〈다했어〉라는 곡에서 “진짜 음악이 뭔데 언더에서 개기는 X? 안 유명해도 사비 털어 앨범 내는 X? (중략) 앨범 팔아서 집이랑 건물 X나 사는 X? 음원 수익으로 먹고 쓰고 다하는 X?”라고 표현한다. 홍대 언더그라운드 정신을 지키는 자신이 진짜 힙합이라며 리스너들에게 어필하는 래퍼들과, 돈을 많이 벌어서 고급 차와 시계가 있는 것을 가사에 녹여내며 이것이 진짜 힙합이라며 리스너들에게 어필하는 래퍼들이 힙합이라는 커다란 틀에 공존하며 일종의 적대적 공생 관계를 만들었다.
이런 논란들은 힙합의 주류 담론이 되며 힙합의 인기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주류 담론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쇼미더머니〉 없이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힙합 씬의 분위기를 나타낸다. 언더그라운드 힙합도 자신만의 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쇼미더머니〉와 그에 출연한 래퍼들을 디스하는 데 소모되었기 때문에 프로그램 폐지 이후에 오버그라운드뿐만 아니라 언더그라운드도 몰락한 것이다.
2018년은 힙합의 중심부와 주변부 모두에서 변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던 해이다. 저스디스와 팔로알토는 〈4 the Youth〉 (2018)를, XXX는 〈Language〉 (2018)를 발매했다. 저스디스와 팔로알토는 힙합 씬의 중심에서 변화하고자 했고, XXX는 주변부에서 변화를 꾀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으나 2018년은 역대 시즌 중 참가자 수준이 가장 높다고 평가받은 <쇼미더머니 777>이 열린 해이자, 딩고 프리스타일에서 인디고 뮤직과 콜라보를 하며 낸 유튜브 영상들과 〈Flex〉 (2018)라는 곡이 유행한 해이다.
래퍼 김심야와 프로듀서 FRNK가 결성한 XXX는 앨범 〈Language〉를 발표하며 돈, 여자, 차로 대표되는 힙합 주류 언어에 대한 회의감을 표출하며 전복을 꾀했다. 하지만 ColoringCYAN가 “그 언어는 주류언어 체계를 맹렬히 공격하면서도, 주류언어에 대한 의미 있는 갈망을 드러내었다. 그러면서도 주류언어 체계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이 아닌, 그들만의 언어를 통해 그러한 갈망마저 드러내면서 XXX 스스로가 그들의 언어가 죽었다는 사실을 긍정했다. 결국 그들은 시작부터 자신들이 주류언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7]라고, 평가했듯이, 그 전복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김심야는 힙합에서 말하는 주류 언어들, ‘돈, 여자’ 등 물질적 가치들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따라서 이런 가치들이 아닌 어떤 대안의 주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들을 본인만의 시각에서 바라본 ‘패러프레이징’에 불과한 앨범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시도가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자면 힙합은 보수적인 장르이기에 전통을 전복하려는 시도는 진정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기존 잣대의 성공을 못 이룬 래퍼가 이것을 의심한다는 것은 그저 불평불만에 불과하다. 김심야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뭐 어쩔까〉 (2018)의 가사에서 “예술은 인간 인간은 욕심 욕심은 돈 Wait hold up 돈 얘긴 그만”라는 가사를 쓰며 돈 얘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서술한다.
그런 의미에서 2019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음반 후보로 〈Language〉가 선정되었으나, 노미네이트 이후 수상하지 못한 점은 인상적이다. 이를 제치고 수상한 음반은 뱃사공의 〈탕아〉 (2018)로, 복고적이고 힙합에서 중요시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음반이다. 전통으로 복귀하는 스타일의 음반이 그 전통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이겼다는 점에서 힙합을 평가하는 잣대의 보수성을 보여준다.
저스디스와 팔로알토는 각각 인디고 뮤직과 하이라이트 레코즈 소속이라는 점에서 (심지어 팔로알토는 하이라이트 레코즈의 사장이었다.) 힙합 씬의 중심부에 있던 사람이다. 씬과 거리를 두며 음악 활동을 하는 레이블인 XXX가 속한 Bana와 그 영향력을 비교하기 어렵다. 〈4 the Youth〉 앨범에서 경쟁과 과시만이 남은 힙합 씬을 비판하기도 하고, (“목에 금을 걸지 못하면 의미 없어, 앞길엔 빨간 불이 그게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던 가사 한 줄이 이제는 거의 멸종 상태라는 사실을 … 그런 래퍼를 보며 되려 하지 래퍼가 지나친 경쟁은 키워, 혐오감”[8]) 한국의 산업화가 기성세대에게 지운 짐을 짚어내기도 한다. (“한강의 기적이 낭만을 지운 우리 어버이의 기억 위로 지어진 피라미드”[9]) 그들 역시 한국대중음악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수상하지 못했다. 지나친 경쟁이 만들어진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특히 힙합씬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짚고, 더 이상 이런 음악이 나오지 않길 바라는 게 앨범의 주제이다. 그러나 이 앨범은 힙합 주류 언어에 대한 비판이라기에는 씬의 중심부에서 하는 자기성찰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마지막 트랙 〈4 the Youth (feat. Various Artist)〉에서 “돈 때문이던 여자 때문이던, 그게 결국 모두 사랑이라는 걸 깨닫는 데엔”이라는 가사를 쓰며 하이퍼-남성성[10]이 드러나는 가사들을 현자처럼 품는다. 결국 이 앨범을 모두 들은 청자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마치 ‘혐오를 혐오하지 말고 모두 사랑으로 품자.’ 식의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둘이 싸웠다고 한 명 등질 수 없네 누구 편들기엔 두 입장 이해돼[11]”는 스탠스였던 것이다.
김심야가 시도했던 장르의 전복은 실패하고, 김심야는 전자음악 쪽으로 이동했다. 최근 그는 자신의 앨범 〈w18c〉 (2023)를 ‘전자음악에 힙합을 얹은 정도의 음악’ 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이때, 주제의 전복을 실패한 그가 가사의 비중을 최대한 줄이고 사운드에 집중하게 된 점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4 the Youth〉 앨범을 발표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낀 저스디스는 본인이 욕하던 쇼미더너미에 출연하고 대중들이 납득하지 못할 만한 이유를 말하며 ‘노선 바꾼 뱀 X끼’ 논란의 중심에 선다. 주변부에서 전복을 시도한 이는 아예 씬에서 벗어나고, 중심부에서 전복을 시도한 이는 중심부의 가장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2018년은 씬 내부에서의 비판이 나올 만큼 힙합씬이 과열된 상태였다. 그러나 비판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기엔 너무 과열된 상태에서 장르 황금기의 끝을 달리고 있었기에 그 전복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힙합의 근본적인 정체성 부재와 정체성 없는 보수주의의 결과는 ‘대중 혐오’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초기 국내 힙합의 적은 ‘자본’이었다. 자본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대중들에게 어필했다. 〈쇼미더머니〉로 성공한 래퍼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쇼미더머니〉에 출연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힙합의 씬이 커진 데 공로한 점은 인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출연한 래퍼들을 욕하는 경우도 대부분 ‘프로그램을 욕해놓고 출연해서’지 출연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에 있는 래퍼들은 자신이 이렇게 타협하지 않고 버티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니 그 원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만든 실체 없는 원인이 바로 ‘음알못[13] 대중’이었다.
2019년 릴보이, 테이크원, 던말릭, 저스디스는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쇼미더머니〉를 욕하다가 출연한 딥플로우와 적대적인 관계이다) 〈Bad News Cypher vol. 1〉 (2019)이라는 곡을 발표한다. 그들은 래퍼들의 수준 저하, 리스너의 수준 저하를 지적하는 것을 통해 음악을 잘 만드는 자신이 인정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좋은 음악해도 귀에 X 박어 배엔 맥도날드 기름이 많어 Classic함을 절대 몰라 넌”, “우리를 평가한 니네들 이어폰 오천 원짜리”, “근데 갖고나니 쓸 데가 없네 5천만이 귀X거리니” 등 여감 없이 모든 걸 대중의 탓으로 돌린다.
이는 버벌진트가 〈투올더힙합키드 투〉 (2007)라는 곡에서 리스너들을 ‘후진 귀’라고 부르고, 인터뷰에서 ‘지진아’라고 부른 것에서 기인한다. 대중에 대한 적대시가 미국의 여성혐오와 만남으로써, 국내 힙합은 대중을 여성에 빗대며 여성 혐오의 범위를 넓힌다.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돈 받고 몸 파는 존재, 그러므로 내가 성공해서 돈 많이 벌면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유지하면서도, ‘음알못’이라는 인식을 더 한다. “리스너 수준 열다섯살 여중딩으로 바꼈으니까”[14]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대중의 이미지가 상상 가능해진다. 바비, 송민호 그리고 지코 등 아이돌 래퍼들이 힙합씬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힙합 좋아하는 여성 팬은 얼빠[15]라는 인식이 자리 잡혔고 이들은 음악이 아니라 얼굴에 관심이 있다고 본다. “우리 팬에겐 팬이란 단어를 쓰기 싫네. 이곳의 팬 대부분 빠순이기에 음악은 중요하지 않아, 얼굴 볼려고 빨려고 하는 groupie들 위해”[16] 이런 팬들과 랩 실력보다 외모 관리에 집중하는 래퍼들이 그들이 비난하는 사람들의 이미지이다.
한국 남성이 주류인 한국에서 래퍼들에게는 미국에서의 백인 남성과 같이 자신의 남성성을 억압하는 뚜렷한 원인이 없다. 여기에 〈쇼미더머니〉로 인해서 반자본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주류에서 밀려나고 어떤 방식으로든 경쟁을 통해 성공을 거둬야 하는 상황,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비겁하고 철없는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 더해졌기에, 실패한 래퍼들이 낼 수 있는 목소리는 결국 성공한 래퍼의 방법론을 문제 삼고, 그들을 좋아하는 팬들을 문제시 삼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힙합이라는 하이퍼-남성적인 장르 속에서는 남성성을 입증하는 게 곧 진정성과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진정성 입증은 ‘너희들이 얻은 트로피는 무식한 여성에 불과하다. 그런 건 내가 못 얻는 게 아니라 안 얻는 거다. 내가 진정한 멋’이라고 말하며, 상대방 래퍼의 성공을 “니네 여자 다 X창 떠먹여줘도 뱉어 투”[17]라는 식으로 비방하며 이루어졌다. 다른 래퍼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강덕구가 『밀레니얼의 마음』 (2022)에서 분석했듯이 ‘성적 자유주의는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의 남성만이 누리기에 이에 실패한 20대 남성들은 외적으로는 자발적으로 포기한 듯이 굴면서, 내면으로는 원망할 대상을 찾는’[18] 것과 유사하다. 자신은 여성 혹은 대중의 인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남성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원하지 않는 여성과 대중을 탓하는 것이다.
힙합은 기존의 담론에서 벗어날 상상력이 빈곤한 장르다. 힙합에서 제한적으로 발휘되는 상상력 중 하나는 성공한 미래의 자신에 대한 상상이다. 이것은 ‘기믹 문화’로 발전한다. 국내 힙합에서 언에듀케이티드 키드가 2019년에 발매한 앨범 〈Hoodstar〉 (2019)로 인해 기믹 문화 열풍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이는 현대인들이 빚을 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단 자신이 돈 많고, 여자에게 인기 많다고 믿으며 랩을 한다. 이후에 성공을 거두면 실제로 돈이 많아진다. 그 이후에는 과거에 허슬해서 성공했다며 실제로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자랑한다.
또, 한국 힙합이라는 이유로 받는 진정성 없음을 기믹을 통해 포장하기도 한다. 2020년 발매된 호미들의 EP 앨범 〈Ghetto Kids〉 (2020)에서는 자신을 게토에서 자란 소년들이라 설정하며 ‘동네에서 사이렌이 울렸고 길거리엔 도망치다 흘린 칼자루와 피가 흥건했다고’[19] 말한다. 미국과 달리 게토에서도 자라지 않은 애들이 어떻게 힙합을 하냐는 비판을 상쇄하기 위해 기믹으로 문화를 차용해서 쓴 것이다.
두 기믹의 형식 모두 기존 힙합의 보수성을 탈피하기 위한 상상력이 아니라, 보수적인 잣대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현실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상상력에 불과하다.
이런 보수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로는 형식상의 특징도 있다. 샘플링을 통해 과거의 음악을 불러와서 다시 소비하거나, 이미 쌓일 대로 쌓인 가사들을 오마주하는 것이다. 저스디스의 1집 〈2 MANY HOMES 4 1 KID〉 (2016)에서 나타난 칸예 웨스트 1집 〈The College Dropout〉 (2004) 오마주나[20], 국내 래퍼들의 수많은 가리온 가사 오마주들이 그렇다. 두 방법 모두 힙합의 전통을 이어 나가는 진정성 있는 행동으로 포장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과거 음악을 새롭게 포장해서 빚을 지고, 다시 미래의 성공을 상정하며 빚을 지는 것은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진정성을 입증한다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그 허구성을 부정하고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더 공격적인 태도로 비판을 방어해야 했고, 그러려면 또 다른 허구의 적들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너무나 공격적이라는 이유로, 허구라는 이유로 더 이상 대출이 승인되지 않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힙합이라는 장르는 마치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끝없이 증명해야 하는 ‘기업가적 주체’가 되길 요구하고, 사회구조 탓을 하는 사람을 그저 불만 있는 사람으로 위치시키고, 물질적 쾌락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기존의 것을 답습하며 이미 성공한 방식을 계속 따라 하고, (주제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성공한 사람들을 동경한다. 성공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 사회가 공정하다는 증거가 되며 체제에 대한 의심을 없앤다. 그리고 레이블로 대표되는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며 현대 사회에 사라진 것을 존재한다고 믿게 만든다. 이들이 이루어 낸 성공과 그 과정에서 만드는 공동체는 현대인들에게 허구와 같은 이야기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기계발서적인 보고서 형식의 신화’이고, 래퍼들은 그 신화 속의 음유시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힙합은 암울한 음악이다. 자신이 처해있는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암울한 상황조차 암울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침묵의 음악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리얼리티에 충실하고, 사라진 공동체가 아직 실재한다고 믿게 만든다. 신자유주의가 규정한 ‘필요한’ 상상만을 발휘하게 하며 개인 차원의 현실에만 저항할 수 있을 뿐, 사회적 차원의 현실에 저항하지 못한다. 허슬의 영역 밖의 저항은 그저 나약한 자의 푸념이라고 평가되며 음악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할 뿐이다. 그들이 넓힌 영역은 단 하나의 영역밖에 없다. 혐오 감정 배설을 저항 정신 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동일시하고, 힙합의 전통이라며 정당화해서 대중문화에서 허용되는 혐오의 범위를 넓힌 것.
트래비스 스캇의 2021년 애스트로월드 뮤직 페스티벌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하며 10명이 사망하고 3,000명이 상처를 입었다. 평소 그는 ‘분노’를 강조하며 팬들에게 콘서트장에서 자신의 분노를 열성적으로 표현하라고 말했다. 원인 모를 분노를, 그 원인을 알아보려는 노력이나, 분노를 표출할 명확한 대상을 설정해 놓지 않고 일종의 흥 혹은 쾌락으로 치부해 두었을 때, 그건 그 어떤 의미 있는 저항이 되지도 못한 채로 증발한다. 그 콘서트장 팬들에게는 공통의 이해 기반도, 공통의 목표도 없었다.[22] 이 사건이 힙합의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문제의식 없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추며 수용자에게 쾌감을 주는 리얼리즘은 포르노와 다르지 않고, 이런 특성이 수요를 창출해내는 한, 힙합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힙합은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가 낳은 사회적 문제이다.
인종적 억압이라는 존재가 사라진 국내 힙합의 저항은 더욱이 실체가 없다. 그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는가? 그들의 가정에서 비롯된 억압? 장르 음악을 하는 것에서 오는 억압? 그렇다면 그 분노를, 누구를 적으로 삼아서 분출할 것인가, 이미 끝나버린 〈쇼미더머니〉? 힙합을 희화화하며 팔아먹는 맨스티어? 아이돌 래퍼와 그 팬들?
언제나 외국 힙합보다 진정할 수 없는 힙합의 한국형 복제품은 끊임없이 무엇이 힙합인지 고민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웹 2.0 시대의 세계화 방식은 한국만의 힙합을 만들 시간을 주지 않았다. 힙합은 타 장르와 섞이며 하위 장르 하나가 정의될 시간도 없이 변했다. 이를 실시간으로 따라가는 입장에서는 하위 장르가 한국적 맥락에서 어떻게 수용되어야 할지 더욱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한국 힙합의 정신적 고장인 홍대 힙합 클럽들도 한국만의 장소라기보다는 미국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된 장소이기에 힙합 클럽은 한국만의 힙합을 만들어내는 물리적 기반이 될 수 없다. ‘홍대로 돌아가자’, ‘우리가 사랑했던 힙합을 하자’는 식의 논의는 한국이 본토가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힘을 잃는다. 국내 힙합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비물질적인 조건인 정신, 지각 그리고 삶, 물질적 조건인 장소 모두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힙합이라는 음악이 한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래퍼들과 힙합 팬들은 한국도 본토처럼 다음절 라임을 가지길 원했고, 한국도 갱스터의 싸움처럼 국내 힙합 자체를 가지고 싸우길 원했으며, 외국의 힙합 클럽과 같은 장소를 가지길 원했다. 한국 래퍼들에게 한국이라는 조건은 극복의 대상이거나, 자신의 음악을 외국 힙합과 차별화할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인디펜던트 함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음악을 만들었지만, 국내 힙합은 단 한 번도 독립해 있던 적이 없다. 그러니 본토로부터 독립해서 한국만의 힙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할지, 현재 한국의 힙합이 얼마만큼 식민화되었는지 질문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 속의 홍대로 되돌아가려는 무의미한 시도를 하게 될 것이다.
이제 〈쇼미더머니〉 이후 한국 힙합을 상상해 보자. 한국 힙합은 〈쇼미더머니〉가 없어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외국에서 유행하는 것을 가져온 후, ‘한국에서 이것이 가능’한지 묻고, 찬/반을 가르고 디스전을 벌이며 본인과 반대하는 이들을 혐오하다가, 외국에서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면 이 행위들을 반복하면 된다. 한국만의 힙합은 외국 힙합의 진정성 조건에 대응할 만한 것을 한국에서도 하나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외국 어디에서도 비교될 수 없는 조건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만의 힙합’을 하는 특징을 지닌 래퍼는 QM이다. 이 기원은 우원재가 2017년에 발매한 〈시차 (We Are)〉 (2017)나 재지팩트가 2010년에 발매한 앨범 〈Lifes Like〉 (2010)에 있다.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그 공간적 배경이 한국이라는 점이 있다. 이는 ‘Korean Dream’이 이뤄지는 공간이나 배신이 넘치는 게토로서의 서울을 등장시켜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앨범은 차붐이 앨범 〈Original〉 (2014)에서 사용한 게토로서의 안산이다.) 미국에 대응하는 한국의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후자의 시도는 결국 그게 허구임이 밝혀져 진정성의 의심으로 이어졌지만, 전자는 한국적 특색이 힙합에 자연스럽게 어울려진다고 평가받는다.
‘한국만의 힙합’의 또다른 특징은 힙합 내부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묻는다는 점이다. 우원재와 빈지노는 더 이상 이런 부류의 랩을 하지 않지만, QM은 그들의 디스코그래피 전체에서 이 주제에 관해 다룬다. 최엘비 또한 한국의 일상적 공간 위에서 랩을 하지만, 그의 방식은 소울컴퍼니 시절의 낭만화된 실패를 반복하는 것에 가깝다.[24] 그는 한국을 바라보는 한 명의 타자인 래퍼보다는,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청년으로서 삶에서 느낀 점을 다룬다는 것을 주목할 만하다.
한국은 겉으로는 더 살기 좋아진 것 같고, 청년들의 대다수는 기성세대가 말하는 ‘정상성’에 맞춰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자리는 없다.[25] 힙합 씬은 커졌고, 윗세대가 만든 레이블에 (QM의 경우 딥플로우가 세운 VMC에) 들어갔고 랩 스킬과 작사 능력이 좋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자리는 없다. 수많은 청년, 수많은 래퍼가 겪고 있는 상황에서 QM은 다르게 반응한다. 일상의 일들을 (아빠의 조기 퇴직, 학자금 생활비 대출 등) 가져오며 청년 속 한 명으로 자신을 위치시킨다. 힙합의 허구성을 노출하면서도 (“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말란 말 멋지게 늘어놨지만 너희가 내 걸 들어줘야 벌잖아”[26]) 같은 곡에서 앞서 언급 해놓은 반포 자이를 보며 느낀 열등감이나, ‘발에 채이는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 등 보편적인 상황을 통해 스스로 래퍼라는 특수성을 흐리게 만든다. 그는 항상 보통의 삶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그는 ‘공감할 수 있는 패배주의’를 여성이나 대중 혐오 없이, 원인을 사회적 조건에서 찾으며 표현한다. 패배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자신의 실패를 감성적으로 낭만화하지 않고 분노를 표출한다. ‘힙합다움’이라는 허구에서 벗어난 그의 음악은 한국만의 힙합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편집위원 정후 | rkskek181@naver.com
[1] 최엘비, 〈독립음악〉, 2021.
[2] 기존에 존재하는 음악을 재가공해서 음원에 넣는 기법을 말한다.
[3] 그래프턴 태너 (2024). 포에버리즘. 24.
[4]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5] Kim Ximya & D. Sanders, 〈Manual〉, 2017.
[6] 쿤디판다 (feat. 저스디스), 〈뿌리〉, 2020.
[7] ColoringCYAN (2019.03.12). “XXX, 『SECOND LANGUAGE』” [웹진].
[8] 저스디스&팔로알토, 〈Cooler than the Cool〉, 2018.
[9] 저스디스&팔로알토, 〈Seoul Romance〉, 2018.
[10]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11] 저스디스&팔로알토, 〈Switch〉, 2018.
[12] 피타입, 〈힙합다운 힙합〉, 2004.
[13] ‘음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줄임말이다.
[14] 저스디스&던말릭, 〈DOPPELGÄNGEM Freestyle〉, 2019.
[15] 아티스트의 음악은 듣지 않고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16] 저스디스&팔로알토, 〈Zombies〉, 2018.
[17] 저스디스, 〈X새X(MotherXucker Pt.2)〉, 2016.
[18] 강덕구 (2022). 밀레니얼의 마음. 216.
[19] 호미들, 〈사이렌〉, 2020.
[20] 예를 들어 〈MotherXucker〉라는 노래는 칸예의 〈We Don’t Care〉라는 노래에서 레퍼런스를 따왔다.
[21] 테이크원, 〈이제는 떳떳하다〉, 2016.
[22]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2013). 미래 이후. 192.
[23] 다이나믹 듀오, 〈동전한닢 (Remix ver.)〉, 2007, 화나 벌스.
[24] 강덕구 (2022). 밀레니얼의 마음. 227.
[25] 강덕구 (2023).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 317.
[26] QM, 〈카누〉, 2020.
참고문헌
단행본
사이먼 레이놀즈 (2014). 레트로 마니아(초판). 최성민, 함영준 (번역). 작업실유령.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2013). 미래 이후. 강서진 (번역). 난장.
강덕구 (2022). 밀레니얼의 마음. 민음사.
강덕구 (2023).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 글항아리.
마크 피셔 (2024).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번역). 리시올.
김수아, 홍종윤 (2017). 지금 여기 힙합. 스리체어스.
앤드류 포터 (2016).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노시내 (번역). 마티.
그래프턴 태너 (2024). 포에버리즘. 김괜저 (번역). 워크룸프레스.
온라인 기사
ColoringCYAN (2019.03.12). XXX, 『SECOND LANGUAGE』. 온음, Retrieved from https://www.tonplein.com/review/album-review/xxx-%e3%80%8esecond-language%e3%80%8f/
기타 온라인 자료
김심야 “이젠 부끄럽지 않은 내용들을 다루고 싶어요.” (2023). HIPHOPPLAYA. 접속일 2024.08. 11.. Retrieved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pNNtZid-QOI&t=470s
MC 워너비 (2017.09.12). 혼자 화난 래퍼들 [온라인 블로그]. 접속일 2024.08.11.. Retrieved from https://brunch.co.kr/@mcwannabe/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