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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뻗고 기다리는 법

[칼럼] 편집위원 서연

혐오의 한복판에서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굽혀 ‘ㄷ’자를 만들어 보자. 사진을 찍을 때 이 손가락을 사용하면 덩치 큰 사람이나 거대한 건축물이 한 손에 들어오게 귀여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고 싶은 문구의 치수를 잴 때 어림 잡는 단위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2021년 이후, 이 작은 손동작은 일순간 남성 혐오의 상징으로 둔갑하여 혐오 표현의 일종이 되어버렸다. 


2021년 5월, GS25 홈페이지에 캠핑 관련 광고 포스터가 게시됐다. 그 안에서 소시지를 잡은 ㄷ자 모양의 손동작이 남성 혐오적인 이미지라는 논란이 일었다. 그 손가락이 남성 혐오 커뮤니티 ‘메갈리아’를 의미하며, 페미니스트 디자이너가 남성의 성기가 작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해당 이미지를 만들고 배치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디자이너는 작업물에 대해 사과하였고 해당 광고는 삭제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필두로 집게 손가락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무신사×현대카드 이벤트 홍보 포스터에서도, 넥슨의 게임 홍보 영상에서도,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남성 혐오자이자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이 찍혀 사회적으로 매장되었고, 심한 경우 일자리를 잃었다.[1]

 

집게 손가락을 ‘색출'해 내는 일은 이제 네티즌의 의무 같은 것이 되었다. 색출 다음은 무엇일까? 색출된 이들을 응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양궁 선수 안산에게 가해졌던 사이버 불링을  떠올려 보자. 2021년, 안산은 숏컷의 이유를 묻는 한 팬의 질문에 “그게 편하니까요~”[2]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숏컷하면 페미 아니냐”라는 주장을 시작하며 페미니스트 나아가 안산 개인에 대한 조롱과 비난을 이어갔다. 이에 그치지 않고 안산의 사상을 검증해야 하며, 페미니스트일 경우 선수가 얻은 올림픽 금메달 역시 박탈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까지 곁들였다. 끔찍한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2023년 11월 4일, 진주에서 편의점 알바를 하던 한 여성이 ‘머리가 짧으니 페미’라는 이유로 한 남성에게 구타당했다.[3] 이를 말리던 다른 남성에게도 무차별적인 폭행이 가해졌다. 피해자는 이제 보청기를 끼고 살아가야 한다. 가해자는 본인을 신남성연대라고 칭하며, 페미니스트에 대한 강한 반발을 드러낸 것으로 밝혀졌다.

 

페미니스트—혹은 페미니스트로 여겨지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사적 제재, 예를 들어 개인을 향한 인신공격과 같은 것들은 정당화된다. 페미니즘을 억압하는 입장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혐오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남성을 혐오하고 있기 때문에 그 미러링으로서의 인신공격, 어쩌면 더한 폭력까지도 정당화된다. 이때, 집게 손가락과 짧은 머리 스타일 같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페미니즘과 남성 혐오의 단단한 연결고리가 된다. 

 

하지만, 이 고리는 영원히 순환한다. “당신이 남성 혐오자인 이유는 당신이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페미니스트인 이유는 당신이 남성 혐오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집게 손가락을 사용한 이유는 당신이 페미니스트이자 남성 혐오자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페미니스트이자 남성 혐오자인 이유는 집게 손가락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위의 순환적인 논증이 오간다. 이 하찮은 논리는 다량의 혐오를 생산할 수 있다. 이제 집게 손가락을 색출하는 것은 일종의 ‘놀이’이자, 네티즌의 ‘의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안티페미니스트들은 행위자를 색출한 뒤 낙인을 찍는 행위를 통해 아군과 적군을 빠른 시간에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적군에게 부여한 ‘남성 혐오자’라는 프레임을 통해 내집단을 강화하고 내집단의 존속에 방해가 되는 ‘페미니스트’들의 가치를 ‘남성 혐오자'라는 의무로 싸잡아 격하시킨다. 

 

집게 손가락은 페미니즘을 왜곡하는 데에 일조한다. ‘집게 손가락 논란'에서 페미니즘은 기호로 축소되고 색출당하는 무언가가 된다. 그렇게 페미니즘이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점점 작아진다. 발언이나 사상의 불건전함, 혹은 오류로 인해 누군가를 비판하는 건강한 공론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공허한 상징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앞세우며 불특정 다수를 색출하고 공격하려 드는 작금의 상황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페미니즘을 색출하는 행위는 페미니즘 기저의 학문/실천적 의의나 판단을 정지상태로 만든다. 페미니즘 논의를 표면에만 고정하고, 진전 없는 혐오와 미러링에 갇히게 만든다. 

 

여성 혐오에 반발하는 페미니즘을 저지하기 위해 남성혐오와 페미니즘을 결합하려 드는 시도는 결국 여성 혐오로 말미암은 수많은 문제들과 페미니즘이 시작한 건강하고 건설적인 논의 모두를 전복하려 하는 것이다. 이 전복의 시도는 하찮은 기호에 의존함으로써 경제성을 확보하나, 동시에 이성적인 논증 과정을 제거해 혐오에 점철된 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혐오의 온상에 대한 분석은 끝났다. 그러나 여전히 찝찝하다. 손가락 논쟁을 비롯한 수많은 프레이밍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사회를 분열시키는 방식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으나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도대체 왜? 왜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실패한 학문’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페미니즘에 반하여 생긴 ‘안티페미니스트’ 진영의 생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어떻게 ‘혐오'하는가


1990년대에 성평등이 제도적 차원으로 보장되며 대한민국에도 안티페미니스트 진영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전통주의적 안티페미니즘의 시작은 1950년대부터 시작되어 2000년대에 호주제 폐지의 성과를 이룬 가족법 개정 운동에 대한 유림 단체들의 지속된 반대나 1999년 이루어진 군 가산점제 위헌결정에 대한 예비역 남성들의 “싸이버 테러” 사건에서부터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소현숙, 2015; 권김현영, 2000; 김보명, 2024:189). 안티페미니즘 진영은 페미니즘의 ‘여권 수호 운동’이 ‘가족’과 ‘전통’을 중시하는 기성 보수주의 세계관을 해친다고 주장한다. 군 가산점제 위헌결정은 IMF 이후 극대화된 취업 위기와 생존 경쟁에 관련된 실질적인 문제로 경험되면서 남성들의 격렬한 저항과 함께 남성 ‘피해자’ 정체성에 기반한 안티페미니즘 실천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젠더 정치학에서 뚜렷하게 가시화되는 ‘20대 남성’들의 보수성은 1990년대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적 사회 재편과 그에 따른 경쟁과 불평등의 심화를 그 배경과 원인으로 하는 현상으로 진단된다(손희정 2015; 민가영, 2022; 신경아, 2023; 김보명, 2024:191). 오늘날의 ‘20대 남성’들은 페미니즘으로 인해 남성들이 받는 피해와 공정성의 침해를 호소하면서 남성 ‘피해자’ 정체성을 수행한다(김수아, 2022; 민가영, 2022; 김보명, 2024: 191). 여성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겠다는 것은 남성의 권리를 격하하거나 앗아가겠다는 뜻이 아님에도, 양성평등을 기반으로 한 정책 혹은 논의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이들은 양성평등 채용목표제, 여성 정치인 비례대표제, 여성 경찰 채용, 성폭력 사건의 수사 및 재판에 있어서 성 인지 감수성 관점의 도입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결국 이 모든 정책은 남성들에 대한 역차별이자 시장의 공정성에 대한 위배(김성윤, 2018; 정사강-홍지아, 2019; 신경아 2023; 김보명, 2024:191)라는 것이며 여성 정책이 여성 인권 신장을 목표로 하기보다, 남성에게 불편과 불이익을 준다는 것이다.


노동시장에서의 성평등 정책은 남성보다 열등하거나 취약하기 때문에 치안이나 안보와 같은 ‘남성적' 업무를 수행하기에 부적절한 속성으로 여겨지는 ‘여성’이라는 성별 범주에 부여되는 ‘특권'으로 간주되며, 남성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박탈당한 ‘피해자’로 범주화된다(김보명, 2024:198). 안티페미니스트들은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시장 사회에서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고용 불안정, 경쟁사회에서의 불안감 자체를 구조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기보다, 남성 내집단 밖의 외부요인을 문제의 원인으로 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의 자기 위로는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의 뜻을 내포하지 않고 이 모든 문제를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돌리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책임 전가의 선두 주자에 대한민국의 젊은 보수층이 있다. 많은 남성 정치인들은 ‘20대 남성’에게 마이크를 쥐여 주고 그들의 대변자가 되길 자처한다. 지난 2021년, 국민의힘 정당에서 최초로 ‘30대 당대표’가 된 이준석이 그렇다. 2018년 이수역 사건 당시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점을 제시했던 것 이후로 이준석은 안티페미니즘을 주된 정치적 입장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젠더 갈등은 정치권력과의 결합을 통해 더욱 거세졌다.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시장 자체의 불안정성이나 인간이라면 갖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분노가 되어 불특정 다수를 괴롭히고 있는 동시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젠더 갈등이라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다수를 괴롭히고 있는 사회 문제의 원인을 애꿎은 젠더 갈등에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며, 동시에 논리적이지 않아 설득력이 없지만, 여론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안티페미니즘 기반의 논의는 힘을 얻는다. 


실제로 비논리의 힘이 차별과 학살을 낳았던 시대가 있었다. 반유대주의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나치의 시대가 그렇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일컫는 단어이다. 어떤 인종을 학살하여 사회를 ‘정화’하겠다는 기획은 반문명적이며 잔인하다. 어떤 인간도 살해당할 마땅한 이유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치에게 ‘유대인’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여겨졌다. 나치 독일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비롯하여 18세기와 19세기의 정치/경제적 난점들을 유대인의 탓이라 돌리며 이 무자비한 차별과 학살을 정당화했다. 반유대주의의 극단에 있는 것이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 독일이 벌인 국가 차원의 박해와 대량 학살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 (Dialektik der Aufklärung)에서 이러한 잔인하고 광적인 집단을 철학적으로 분석했다. 이때, 이들은 반유대주의의 집단적 광기를 진단하는 데에 있어 이디오진크라지{Idiosynkrasie}를 소환한다. 이디오진크라지란 자기방어적인 개인적 성벽, 자기 통제 상실을 의미하며 혐오감이 너무 지나쳐 병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심리학적 맥락에서 이디오진크라지는 위생이나 청결에 대한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하여 자신과 타인을 거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철학적 맥락에서는 어떤 주체가 개인의 특정 성향을 대상화하여 자신과 구분 짓기를 실행하는 경우를 말하며, 이 구분 짓기가 심화함에 따라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이디오진크라지는 개념적 질서에 타자를 집어넣는 행위에서 촉발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타자가 합목적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을 때, 이디오진크라지는 발현한다. 예를 들어 석판 위에서 조각칼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 똥이나 부식물을 연상시키는 퇴폐 취미 등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무엇이다. 본능적으로 이질감을 느끼고 외면하고 싶어지는 것들, 그 대상이 이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인간이 될 때, 그리고 체제에 의해 병적인 광기가 합리화된다면 이디오진크라지는 끔찍한 폭력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다음은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의 부분이다.


정치적인 반유대주의가 가동시키고 있는 영혼의 에너지는 이와 같은 ‘합리화된 이디오진크라지'이다. 총통이나 추종자들이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변명은 모두, 현실 원칙을 위반하지 않고 명예롭게 미메시스적인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유대인을 용납할 수 없지만 유대인을 끊임 없이 모방한다. [중략] 분노와 조롱과 독기 서린 모방은 본래 하나다. (275~276)
유대인은 터부시된 충동을 체제 순응적 이디오진크라지로 전환시키는 데 매우 적합한 존재였으므로 유대인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러한 기능을 떠맡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은 파시즘이 유도하는 대로 ‘반항하는 자연'의 운명을 함께 감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유대인들 개개인이 고약한 전염성을 지닌 그런 미메시스적 경향을 갖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러한 유대인의 모습이 날조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재계의 실력가들이 파시즘 정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자, 유대인은 자동적으로 민족의 공동체의 조화를 해치는 요인으로 부각하게 되었다. 지배가 점점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마침내 단순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유대인은 지배의 제물이 되었다. (278) 


사회 속에서 개인은 일관성을 유지하며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다. 문명 안에서 인간은 일상화된 미메시스(모방 혹은 재현)의 반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입증하고, 반복되는 행동 경향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화된 주변 세계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지 못하는 행동이나 말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이 당황 안에서 잘못된 ‘투사'가 일어난다. 미메시스[4]가 주변 세계와 유사해지려고 한다면 잘못된 투사는 주변 세계를 자기와 유사하게 만들려고 한다. ‘친해지기’와 ‘강제하여 바꾸기’는 엄연히 다르다.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이 독일 사회에 미쳤던 힘을 전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유대인은 전복의 틀 안에서 반항하는 자연으로 설정되었다. 자연은 문명이 퇴보했음을 보여주는 퇴보의 흔적을 제시하고, 보편자가 아닌 특수자로 여겨지며 ‘공포'를 제공한다. 유대인을 자연으로 설정하여 주체를 공포로 밀어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아도르노에 따르면, 반유대주의의 ‘증상’은 병적인 투사{Pathologische Projektion}의 결과이다. 프로이트에게 증상은 억압의 결과이므로 병적인 투사는 억압에 해당한다. 투사란 주체가 느끼는 감정이 주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 대부분은 ‘통제된 투사'를 갖고 있다. ‘통제된 투사’ 안에서는 이 병적인 투사를 감각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거치기에 주체와 객체 간의 건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통제된 투사'가 ‘병적인 투사'로 변모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병적인 투사'는 사회적으로 터부시된 충동을 주체로부터 객체에 전이시킨다. 아도르노는 공격욕을 예시로 든다. ‘병적인 투사' 안에서 공격욕은 정당화된다. 자신이 어떤 대상에게 분출하는 즉각적인 ‘혐오', 나아가 자신에게도 파괴적인 공격 욕구를 악한 의도를 가진 외부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 일축한다. 즉, 혐오로 시작된 공격 욕구가 사악한 외부 세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는 변명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충동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은 ‘후각에 탐닉하고, 노동을 천시하며, 자유로운 욕망을 지니는 민족’으로 여겨졌다. 이것들은 모두 계몽적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속성들이다. 이러한 가상적 속성들은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이끌어냈다(이동휘, 2019:71). 독일인들은 오해를 사실로 만들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독일 시민의 경제 상황을 악화하고, 독일인이 끔찍한 구렁텅이에 빠졌을 당시 제 배 불리기에만 급급했던 사악한 민족이며,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든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파의 일종이라는 논리까지 상상해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유대인에 대해 독일인이 상정한 가상적 속성은 노동과 통제적인 삶에 지쳤던 독일인 스스로가 열망했던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상업 감각, 그로 인해 얻었던 부와 명예들은 독일인에게 어떤 ‘미메시스 충동'[5]을 일으켰다.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그들처럼 부유해지고 싶다고, 그들처럼 뿌리 깊은 민족이 되고 싶다고……. 유대인을 혐오하는 행위는 행위자 자신이 ‘유대인적인’ 충동을 지녔음을 재차 은폐하고 억압하기 위한 방편이었다(이동휘, 2019:71).


그리하여 엄청난 혐오로써 유대인을 악으로 상정한다. 자신들이 두려워할 수 있고 동시에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악. 즉 병적인 투사는 절망적인 자아의 자구책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도 반유대주의자인 주체의 주관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병적인 투사 안에서는 유대인이 혐오감을 ‘발현'하는 것처럼 표현된다. 자기 자신을 위해 유대인을 ‘공포'의 표지에 밀어 넣는 것이다. 유대인을 공포의 표지에 둘 때, 그리고 그 낯선 민족을 전복해야 할 반항하는 자연으로 상정할 때, 그들에 대한 무자비한 압박과 차별, 나아가 학살에 대해 변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인용문처럼, 유대인이 실제로 독일 사회를 전복할 고약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실제로 독일의 정치/경제 혼란의 원흉이었는지, 그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반항하는 자연이 문명의 승리로서 학살당한 것이다. 논리는 결국 야만성으로 돌아간다. 


이디오진크라지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임과 동시에 동일화를 향한 욕망이다. 따라서 동일화를 거부하는 것들에 혐오적 반응을 가지게 되고, 이질적인 것들을 의도적으로 동일성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폭력성을 가진다. 이디오진크라지의 주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을 가질 때 이 폭력성은 더 강해진다. 누군가를 청소하듯 학살할 수 있는 엄청난 권력이 주어지면, 인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지옥을 고안해내게 된다. 


페미니즘은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 이질적인 무언가다. 페미니즘은 자신들이 살아왔던 환경을 거부하고 시작된 것이며,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 누려왔던그러나 공평하지 않았던것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여성 차별에 반대하고, 성평등을 제도화하는 것, 사회 안에서 다양한 여성 의제를 제안하는 것은 동일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이때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 이디오진크라지가 발현한다. 페미니즘의 요구는 시끄럽고 성가시다. 조각칼이 석판을 스치며 내는 불쾌한 소리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조각칼은 치우면 되지만, 사람은 ‘짜증 난다'는 이유만으로 치울 수 없다. 따라서 적합한 이유를 붙이기 시작한다.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자신의 자구책으로 삼았듯, 안티페미니즘 역시 여성 혐오를 자신들의 원동력이자 자구책으로 삼는다. 먼저, 사회적인 구조로 인해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의 원인을 페미니스트들에게 전가한다. 97년 외환 체제 이후 산업 자본주의의 몰락과 함께 외환위기의 해결책으로 도입된 신자유주의 체제는 노동 유연화 정책을 필두로 많은 인원을 노동 시장에 편입시켰다. 가사 노동에만 전념하던 여성들이 취업 전선에 내몰려 가사 밖 노동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경제생활과 개인의 능력을 통한 성취를 강조하며 한국 사회에 ‘경제적인 성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풍조를 확산시켰지만, 구조적으로는 실업자를 만들어 노동 불안정성 문제를 야기했다. 가부장들이 노동 유연화 정책에 의해 일자리를 잃을 때, 집안의 여성들이 그 차선책으로 생업에 나서게 되면서 가부장제의 틀 역시 흐려졌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산업자본주의를 대체함과 동시에 가부장제의 기틀을 흔들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남성성 위기의 고조는 여성혐오가 확산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했다(Kim. 2018; 구지혜-김민철 2023:119). 특히 1999년 군가산점 폐지와 2001년 여성부의 출범은 남성이 여성에게 뒤쳐질 것이라는 공포가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구지혜-김민철, 2023: 119). 군 복무로 인해 경제적 생활의 공백이 생겼음에도 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데다가, 이런 상황에서 성별 할당제와 같은 여성 취업을 돕는 정책이 실시되는 것을 보며 남성들은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인식은 결론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 내의 구조적 불평등에 무지하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일인이 독일 사회가 갖고 있던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해 유대인이라는 허구의 적을 상정했던 것처럼, 남성은 여성을 허구의 적 삼아 사회/경제적 격차로부터 말미암은 패배감 혹은 불안감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페미니즘을 남성 혐오의 맥락과 결합하는 것은 ‘병적인 투사’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 인권 신장이라는 제1 목표를 수행하는 실천적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남성 혐오의 맥락과 결합시키며 ‘혐오 분자’의 이미지를 덧입히는 이유는 결국 페미니즘에 선악의 이분법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안티페미니즘 커뮤니티에서 ‘페미=메갈=워마드=일베’와 같은 주장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일베라는 윤리적 정당성이 결여된 조직과 메갈리아와 워마드를 동일시함으로써 여성주의 커뮤니티가 반민주적인 악의 세력이라는 인식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이다(구자혜-김민철, 2023:139). 이러한 배제의 논리에서 안티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악의 표지로 밀어 넣어 악한 것으로 만들고, 악하기 때문에 배제하고 색출해 응징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형성한다. 


앞서 언급한 ‘GS25 집게 손가락 논란’을 기억하는가? 이는 페미니즘을 일종의 ‘음모론' 취급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논란 당시, 남초 커뮤니티에서 포스터에 집게 손가락을 넣은 것은 “페미니즘 사상을 홍보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일었다. 이 음모론의 핵심은 페미니즘이 여론을 선동하고 남성의 사회/경제적 지위나 명예를 위협하고 있으며, 여성가족부와 같은 국가 기관을 조종하는 배후 세력의 주축이라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 및 혐오로 인한 피해를 고발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탄생한 페미니즘에 대항하여 남성인 자신도 음모론의 ‘피해자’라는 논리를 펼친다. 이러한 음모론의 목적은 남성의 사회경제적 우월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그들(여성)을 남성들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것이다(구자혜·김민철, 2023:143). 결국 여성 혐오 담론에서의 페미니즘은 ‘악’이 되어 저편에 서 있다. 이들에게 페미니즘이 정말 ‘음모론’적 성격을 가졌는지, 실제로 배후에서 그런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페미니즘을 음모론으로 만들어 공포를 조성하면 된다. 공포를 통해 ‘남성’의 결집을 도모하고, 분노하게 만들어 갈등의 진폭을 키운다. 젠더 갈등의 한복판에서 페미니즘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불행한 일은 되풀이된다. 


악을 설정하고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것은 결국 이성과 논리를 들이대 보았자 실패한 계몽에 불과하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은 사회 문제의 해결을 화합과 배려로 풀어나가기보다 무책임한 책임 전가로 풀어내려 하고 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반유대주의는 몰락하였고 독일은 전범국 낙인을 안고 살아간다. 낙인을 찍었던 주체들은 도리어 낙인 찍힌 객체가 되었다. 안티페미니즘은 도대체 어떤 패망의 길을 걷기 위해 병적인 투사를 반복하는 것인가? 안티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에서 ‘그럴듯한’ 불행의 원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행은 안티페미니즘이 자행하는 혐오와 투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국 두려움과 분노를 먹고 자라 안티하게 살아가는 안티페미니즘 안에 불행의 싹이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나치는 패망했고 반유대주의는 축소되었다. 반유대주의의 축소로 이 세계의 폭력과 슬픔이 저지되었다면 좋겠지만, 세상사는 칼로 자른 듯 깔끔하지 못하다. 반유대주의에 대항하며 시온주의가 탄생했다.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인 이스라엘을 세움으로써 유대인 특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과 근처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의 반발이 일었다. 시온주의는 반유대주의라는 폭력에 맞서 유대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가장 대표적인 정치 성향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자 지구 학살에 일조하고 있다. 차별과 폭력에 맞서는 것이 늘 ‘비폭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유대주의와 안티페미니즘이 닮아 있음을 확인했다면, 우리도 우리의 분투가 어떤 방향을 향해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불행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를 잊지 않아야 한다. 인간은 대의를 위한 희생에 적응한 동물이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정치 형식인 민주주의도 그런 희생의 산물인 것처럼, 페미니즘도 소소한 희생을 당연히 여기며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안티페미니즘과 싸우기 위해 페미니즘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포기하고 있는 것들은 없는가?


이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요청됨에 따라, 페미니즘 논의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 대중화가 마냥 긍정적일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벨 혹스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지배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며 젠더 차별을 근절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투쟁이므로 근본적으로 급진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이곳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일부 페미니즘이 ‘급진성’과 ‘극단성’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안티페미니즘에 맞서 우리가 ‘페미니즘’ 안에서 또 다른 ‘안티’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성별 이분법 안에서 벌어지는 ‘성차별’ 뿐만 아니라 ‘젠더 차별’을 근절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재 10대, 20대 여성을 중심으로 대중화된 급진적 페미니즘은 ‘급진성’을 무기로 타자 차별에 앞장선다. 기본적으로 급진성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여성’ 이외의 정체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이 아니라면 페미니즘에 대한 발언권이 없다고 생각해 비여성 타자를 공론장에서 배제한다.


앞서 언급했듯 신자유주의는 남성 기반의 보수주의와 결합했지만, 동시에 여성주의와도 결합하여 여성들에게 가부장제 아래에서 강제되었던 성역할을 거부하고, 개인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에 대한 우려를 표현다. 여성이 페미니즘을 생존전략이자 성공을 위한 논리로 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중산층 젊은 여성들의 야망이 페미니즘을 주도하고 있다”고 말하며 “안타깝게도 많은 여성이 신자유주의적 여성주의를 지지하고 그것이 원래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성소수자 난민, 사회적 약자의 현실은 나중에 다룰 문제이거나 여성주의와 무관하다고 본다.”고 언급하며 페미니즘 대중화에 따라 페미니즘이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잠식되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6]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 유연화 과정에서, 인간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경쟁하고 또 경쟁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신자유주의 시대는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시대이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피해자 논리와 가부장제 아래 지내왔던 여성들의 피해자 논리가 결합하며, 결국 ‘생물학적 여성’만이 이 모든 피해의 주인이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여성 정체성을 유일한 조건으로 삼고, 페미니즘 안에서 비여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문제는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우선, 이들은 성별 이분법적으로 페미니즘 의제에 접근한다. 이 과정에서 ‘진짜 여성’을 필두로 나아가기 위해 트랜스젠더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주장을 펼친다. 성전환을 받은 트랜스 여성이라도 염색체는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페미니스트의 자격으로서 ‘생물학적 여성’을 강조한다. TERF는 X(구 트위터)를 비롯한 SNS상에서 트랜스젠더와 그 지지자들을 괴롭히고 비웃으며 페미니즘 안의 ‘안티’, 또 다른 차별과 혐오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나아가, TERF는 ‘안전’을 키워드로 공포를 조장한다. 트랜스젠더를 ‘위험 요인’으로 상정해 이들이 여성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고, 여성만의 공간을 침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TERF의 실천은 배타적인 경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특정 소수자들을 향해 혐오 발언이나 타자화 전략을 일삼고 있고, 또한 이것이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의 탈정치화를 이끌고 있다(이효민, 2019)는 의견도 존재한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 선동은 트랜스젠더를 공적 공간에서 몰아내는 결과를 낳는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한국 사회가 여성 대상 폭력과 배제에 대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분노감이 TERF가 트렌스젠더 혐오를 선동하는 배경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7] 여성의 안전에 대한 요구는 이 사회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안전을 위협하는 주체가 모든 트랜스젠더로 매도되어 트랜스젠더 전체를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고 혐오를 양산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이는 우리가 앞서 검토한 반유대주의적 혐오 전략과도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지 않은가? 허구의 적을 악으로 만들고, 악을 전복시키기 위한 폭력을 ‘어쩔 수 없었다’라는 변명으로 일축하는 행위는, 어쩌면 반유대주의, 안티페미니즘, 그리고 TERF 모두가 갖고 있는 성질일 수도 있다. 


무언가에 맞서 싸운다는 것, 그래서 생기는 대결 구도는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힘을 가지지만,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모두 ‘아군’으로 만들어 정작 중요한 논의를 뭉그러뜨리기도 한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이 자행하는 혐오에 맞서는 페미니즘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래서 등장했던 것이 ‘여성’을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상정하고, 그렇게 범주화된 ‘여성(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들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고자 했던 정체성 정치가 대표적인 경우다(이효민, 2019:168). 그러나 여성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페미니즘은 여러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여성 정체성만이 페미니즘을 전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고, 다른 정체성 범주로 인한 억압과 차별이 페미니즘 내부에서 간과되는 것은 우려할 만하다. 차별과 억압,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주체의 경험은 단일한 층위로 분석될 수 없다. 그러나 페미니즘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과 계급, 연령이나 섹슈얼리티, 인종 등에 기반한 논의가 축소된다는 것은 결국 ‘여성 정체성’에 근거한 정체성의 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양성평등 문제에는 비판적이지만 다른 정체성에 기반을 둔 특권을 통한 스스로의 존재론적 공모(김미덕, 2016)에 무지한 셈이다(이효민, 2019:170). 


여성학자 정효진은 한국의 페미니즘 대중화가 공동체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세계에는 다양한 페미니즘이 존재한다. 포르노그래피와 성매매를 모두 근절하자는 안티포르노 페미니즘, 반대로 성 해방을 주장하며 여성의 성 문화를 탄압할 것이 아니라 발전시켜야 한다는 성 긍정 페미니즘처럼 극단적인 방식의 페미니즘도 존재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난민을 반대하고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안티페미니즘에 대항하여 페미니즘을 외칠 때, 또 다른 폭력과 무지를 용인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안티페미니즘이 모든 페미니즘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어떤 페미니즘으로 안티페미니즘에 맞서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우리가 그저 ‘페미니즘’으로 맞서겠다면, 그 안의 폭력을 용인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저항하며 탄생하는 것이 언제나 비폭력이면 얼마나 좋을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분투하겠다는 페미니즘이 ‘급진적인 정치학’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지금, 유의미한 의제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내부의 차별과 폭력에 엄중히 대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성’이라 할지라도 다른 정체성 범주에 따른 ‘어떤 특권을 갖고 있음을 이해하고, 그 특권을 내려놓는 또 다른 투쟁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것(안팎 2017:18) 즉 ‘자신이 어떤 점에서 억압받고 있으며 다른 어떤 점에서 타인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안팎 2017; 이효민 2019). 페미니즘 안에서 인종, 섹슈얼리티, 계급, 연령, 그리고 젠더를 고려하는 것은 ‘여성’의 범주를 축소하거나 무력화하지 않는다. 이효민에 따르면, 페미니즘 안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고려하는 것은 ‘여성’ 내부의 차이를 의제화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구성해 냈을 때 가부장제를 뒤흔드는 급진적 페미니스트 정치가 가능해지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팔을 뻗고 기다리는 법


여성의 삶은 날이 갈수록 취약해진다. 넥슨의 게임 홍보 영상에 ‘또' 집게 손가락 논란이 일었다. 2023년 11월, 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넥슨에 납품한 홍보 영상 속 여성 캐릭터가 집게 손가락 포즈를 취했다. 일부 누리꾼이 해당 집게 손가락을 남성 비하의 목적이라 주장하며 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를 문제가 제기된 장면의 콘티를 그린 인물로 지목되었다.[8] 해당 직원은 그 장면을 그린 적도 없음이 밝혀졌지만,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이 직원이 ‘남성 혐오’를 했다며 직원 개인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모욕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해당 직원은 자신에 대한 게시글을 올린 사람들을 정보통신망법(명예훼손), 성폭력범죄처벌법(통신매체이용음란) 혐의로 고소하였는데, 7월 24일 이 고소 건은 불송치(각하) 처리되었다. 불송치 결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찰은 “비록 고소인(A 씨)이 관련 그림 담당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나, 고소인이 소속한 회사는 집게손가락 동작과 관련해 사과문을 게시한 바 있다”며 “고소인 또한 이전에 페미니스트를 동조하는 듯한 내용의 트위터 글을 게시한 사실이 있는 바, 피의자들이 고소인을 대상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 논리적 귀결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또, “현재 대한민국에서 ‘집게 손가락 동작’을 기업 광고에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되는 것이 현재의 풍토”이고, “피의자들의 글은 전체적으로 A 씨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극렬한 페미니스트들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표명하는 과정에서 다소 무례하고 조롱 섞인 표현을 사용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이때의 ‘부적절한 행위’는 ‘자신의 작업물 등에 몰래 집게 손가락을 넣는 행위’이다. 더불어 X(구 트위터)를 통해 고소인에게 가해진 통신매체이용음란 혐의는 상당하나 트위터가 미국 소재 기업이기에, 협조 범위를 특정할 수 없고 따라서 수사를 계속할 실익이 없다고도 밝혔다.

사건이 도마 위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해당 경찰서에 민원을 제기했다. 이 사건을 조금 더 ‘숙고’해달라는 것이다. 해당 직원이 겪은 언어 폭력을 그저 ‘무례한 언행’ 정도로 축소하고, 직원이 페미니스트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이자 여성혐오를 용인하는 행동이다. 민원이 폭주하자 서초서는 지난 8월 7일, 보도자료를 통해 “일부 혐의에 대해 수사가 필요함에도 수사를 진행하지 않고 각하 결정한 것은 미흡한 결정”이라며 “경찰이 (해당 사건을) 재수사할 수 있도록 검찰에 요청해 협의가 완료되는 즉시 신속하고 공정하게 재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면 재조사가 아닌 일부 혐의에 대한 조사라는 점에서 피해자가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한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받기 위한 투쟁은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이며, 이 투쟁은 ‘생존’과 결부된다. 이 사건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없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명백히 편파적이고 성차별적인 경찰의 판단은 용인되었을 것이며 피해자 홀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을 것이다.


페미니즘은 사회 속 당연하게 여겨지던 불공정과 불공평함에 대해 ‘숙고’하며 탄생했다. 익을 때까지 생각한다는 의미의 숙고{考}는 그만큼 오랜 시간을 들여 헤아리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오랜 시간을 들여 여성의 삶을 숙고한 데에 반해 안티페미니즘의 논리는 본능적인 혐오가 지배하고 있다. 본능적인 혐오는 페미니즘 밖뿐만 아니라, 정체성 정치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일부 페미니즘에도 존재한다. 이는 페미니즘이 여성의 삶과 사회 안의 젠더 차별에 대해 ‘숙고’하려는 정신과 다르다. 


페미니즘을 본능적으로 혐오하고 공격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의적인 판단과 공격으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에 상처받고 싶지 않은 주체들은 혐오 발언을 한 주체를 빠른 속도로 판단하고 공론장 밖으로 내보낸다. 오늘날의 ‘캔슬 컬처’와 같은 맥락이다. “당신의 발언이 성차별적/혹은 젠더 차별적이므로 우리는 당신을 소비하지 않겠습니다.”가 캔슬 컬처의 본질이다. 이것은 어쩌면 혐오 발언의 대상이 되는 불특정 다수의 마지막 권리일 것이다. 존중받지 못했으니, 존중하지 않은 당신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혐오에 대한 무지를 발산한 주체에게 분노하고, 분노로 인해 즉각적인 판단을 하는 것. 나아가 잘못한 사람을 완전히 배제하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최후의 발악이 정말 ‘최선’의 방법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 (The Monarchy of Fear)에서 분노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한다. 분노는 민주주의의 독으로, 드러나지 않는 두려움과 무력감의 영향을 받을 때 더 심각해진다. 여성 혐오에 대한 두려움과, 이 문제를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의 분노가 더욱 거세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누가 누구에게 그 행동을 했는지, 실수인지 악의적인 행동이었는지, 혹은 그 행동이 개인, 사회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을 때 분노는 엉뚱한 대상을 향할 수 있고 분노의 주체를 타락하게 만들 수 있다. 사회에 분노와 혐오를 더 양산하는 셈이다. 우리는 보다 차분하게 생각하고, 정확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의제들을 펼쳐 놓을 안전한 공론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분노와 보복이 아닌, 유대와 인정이 필요하다. 어떤 무지는 해소될 수 있고 어떤 혐오는 반성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무지와 혐오가, 그리고 그 주체가 영원히 우리의 적일 것이라 믿는다. 숙고 없는 참여는 위험하다. 그것이 아주 적극적 참여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주체를 낙인찍고 공론장에서 추방하는 등, 문제 사안을 ‘절단’해 버리는 식의 해결책은 바람직하지 않다. 범죄나 혐오 발언을 참아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범죄와 혐오 발언을 절대 용인하지 않기 위해 숙고가 필요하다. 문제 사안을 사회적 의제로 이끌어 낼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다. 


익지 않은 열매는 떫고 시다. 그러나 조금 기다리다 보면 잘 익은 열매가 뚝 떨어진다. 숙고는 판단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 시간을 더 쓰는 것이다. 혐오를 발산한 주체를 영원한 적으로 돌리는 이 습관이 역사 속에서 여성이 감내해 온 차별과 상처의 흔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숙고할 필요가 있다. 차분히 시간을 쓴다면, 우리는 상대를 악마로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모욕을 갚아줄지 궁리하기보다 어디에 힘을 보태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팔들을 나누어 가지려고 해 

공중에서 힘없이 털썩 내려앉는 팔을,

유언을 전하려고 눈꺼풀을 떨면서 

입을 떼는 순간 툭 떨어지는 팔을,

허리가 거의 다 굽은 할머니가 아픈 무릎을 펴며

검은 봉지에 방울토마토를 한 움큼 덤으로 주는 팔을,

등 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대신 받아주고 막아주는 팔을,

아무리 노력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모습이 더욱 피참해져서

가슴을 두드리는 팔을,

흐르지 않은 눈물방울을 그리며 물기를 느끼고 갈라지는 두 뺨을 닦는 팔을,

죽은 작곡가가 쓴 곡을 연주하기 위해 꺾는 최초의 각도를 사랑하는 팔을,

박수하는 팔을,

인사하는 팔을,

<중략> 

바람에 맡겨보려고 해 그냥 편안히 흔들려보기로 해 

팔들을 나누어 가지며 더 붉은 뺨을 어루만질 수 있나요

떠도는 팔들을 한데 그러모으면 더 많은 영혼을 돌이킬 수 있나요

공중에 모인 팔들이 만든 그늘이 땅에 엎드리다가 기어다니기도 하면서

오늘은 그늘이 필요한 사람 사랑하는 대상의 크기만큼 얼굴이 조각난 사람 

금빛 언덕이 이완되도록 심호흡해야 하고

뾰족한 공기 속에서 터지지 않는 피부를 배워야 하는 사람 

팔들이 모여 스스럼 없이 사람을 껴안으니

사람이 비로소 흐느끼네 나무가 되려 하네

없는 팔을 더는 그리워하지 않네

없는 만큼 바람을 뿌리로 가지로 뻗을 수 있으니 

잠시 쉬고 싶은 자리에 누워

팔들을 나누어 가지려 해

팔을 뻗으니 새로운 팔이 돋아나 다가오려 해

가까이는 가겠으나 붙잡진 않으려고 해

단추를 잠궈주는 팔을,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도 억센 팔을,

버들잎 아래 차례로 누워 


이기리, 「수양버들」


이 시에서의 ‘팔’은 수양버들의 것이지만 ‘팔들이 모여 스스럼 없이 사람을 껴안으니/사람이 비로소 흐느끼네 나무가 되려 하네’라는 서술을 통해 수양버들에 사람을 투영하게 된다. 수양 버들의 팔은 이제 사람의 팔로 읽힌다. ‘공중에서 힘없이 털썩 내려앉’고 비참해져서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고 ‘흐르지 않은 눈물 방울을 그리며 물기를 느끼고 갈라지는 두 뺨을 닦’으며 슬퍼하지만 동시에 ‘등 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대신 받아주고 막아주’고 ‘죽은 작곡가가 쓴 곡을 연주하기 위해 꺾는 최초의 각도를 사랑하’고 ‘박수’하고 ‘인사’하는 팔. 팔은 사람을 닮았다. 이 시의 제목인 수양버들처럼 인간의 신체 일부인 팔도, 사람도 바람의 방향에 따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 고정되어 있거나 납작하지 않고 영원히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그래서 수양버들도, 팔도, 사람도 변할 수 있고 나아가 생장할 수 있는 것이다. 


시에서 팔을 뻗으면 새로운 팔이 돋아난다. ‘나’는 돋아난 팔을 단숨에 붙잡기보다는 가까이 다가가 기다리는 편을 택한다. 다정하게 ‘단추를 잠궈주는 팔’은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도 억세’고 그런 팔을 가진 우리는 ‘스스럼 없이 사람을 껴안’을 수 있다. 사랑하기보다 혐오하기 쉬운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얼마나 ‘뾰족한 공기’ 아래 호흡하고 있는지 생각한다. 그 안에서 ‘터지지 않는 피부’를 가지려면 단숨에 미워하기보다 팔을 나누고, 팔을 나누기 위해 ‘잠시 쉬고 싶은 자리’인 ‘버들잎 아래’에 누워야 한다. 다 굽은 무릎을 펴며 ‘검은 봉지에 방울 토마토를 한 움큼 덤으로 주는’ 마음처럼 힘을 보태자. 할머니가 무릎을 피실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봉지에는 맛볼 수 있는 달콤한 열매가 담긴다. 유예된 판단 사이로 어떤 현명함이 스칠지 모르는 일이다. 팔이 잘려 더 이상 팔을 뻗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과 무력함이 우리를 감싸안아도, 새로운 팔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팔을 뻗어 ‘스스럼 없이 사람을 껴안’아야 할 때를. 


편집위원 서연 ㅣwaveandwavy@gmail.com


[1] ‘드릉드릉'과 집게 손가락… 정말 ‘남성혐오’인가 (2024.07.04.). 오마이뉴스. 

[2] '숏컷=페미, 안산=페미' 논란에···숏컷 여성 "해외 토픽감" (2021.07.29.). 중앙일보. 

[3] 진주 편의점 폭행 피해자 "평생 보청기 착용"...가해자, 법정에서 한 말은? (2024.04.04.). YTN.

[4] 미메시스는 결국 비동일한 타자를 지각하는 방식이자, 타자에게 합당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5] ‘미메시스 충동'은 타자와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성취하고자 하는 충동이라 할 수 있다. 

[6] 페미니즘 대중화, 공동체 모두가 성찰해볼 때 됐다. (2021. 09. 17). 한겨레. 

[7] 위의 자료.

[8] ‘넥슨 집게손’ 각하 결정했던 서초경찰서, 재수사… “미흡한 결정 인정” (2024.08.07.). 여성신문.


참고문헌 


단행본

마사 누스바움 (2020). 타인에 대한 연민. 임현경 (번역). RHK.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W. 아도르노 (2001).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번역). 문학과 지성사.

이기리 (2022).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문학과 지성사. 

한상완 (2023).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 에디스코.


논문 및 저널

구지혜, 김민철 (2023). 온라인 공간에서의 반페미니즘 담론에 관한 연구: GS25 남성혐오 논란과 음모론. 아시아여성연구, 62(3), 115-153. 

김보명 (2024). 한국사회 보수우파 안티페미니즘의 담론과 실천: ‘20대 남성’과 보수개신교 안티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40(1), 183-211

김현미 (2018).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와 페미니스트 비전. 한국여성학, 34권 3호, 147-154.

박주영 (2024). 억압의 교차성: 오드리 로드의 감정의 정치학. 영미문학페미니즘, 32(1), 61-101.  

안팎 (2017). 교차성, 흑인페미니즘에서 퀴어페미니즘까지. 펢 2017 특별판,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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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및 온라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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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08051938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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