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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청년들에게

[특집 '청년' 닫는 글] 편집위원 민지

그러니까 나는… 나의 청년기가 이렇게 초라할 줄은 몰랐다.

 

느지막이 일어나 대충 밥을 해 먹고 한동안 누워서 유튜브, SNS, 인터넷 탭을 전전하다가 하루를 보내는 것이 내 삶이 될 줄이야. 할 일을 급급히 해치우고 미래에 대해서는 막역한 두려움을 가지고 ‘뭐라도 되겠지’ 생각하며 외면하는 것이 나의 청년기일 줄은 정말 몰랐다.


어쩌면 허탈하기도 하다. 내가 생각했던 청년의 모습은 지금의 나와 같은 모습은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커가면서 생각했던 ‘청년’이란 모름지기 변화의 선봉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광우병 시위에 참여하고, CJ 감성의 일명 국뽕 영화를 보며 들었던 감상이다. 중학생 시절,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 시위에 참여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청년이란 잃을 것도, 두려움도 없기에 대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청년만의 무모함에서 비롯된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도 청년이 되면 대의를 위해서 힘쓰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뿐만 아니다. 꼭 세상을 변혁시키는 주체로서의 청년이 아니더라도, 매체 속에서 ‘청년’이라는 존재는 ‘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 등의 각종 아름다운 수식어와 함께 재현된다. 청년, 20대, 대학생. 이러한 단어들은 환상을 동반한다. 청년들은 막무가내에 서툴고 가진 게 없지만, 사랑과 우정을 위해 투철한 존재이며, 술에 취해 길거리에 뻗어보기도,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는 존재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청년은 그 필연적 속성인 젊음과 함께 하기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 괜찮으며 회복 가능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러한 환상은 청년기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이들(이를테면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에게는 행복한 청년기를 위해 달려 나가기 위한 마취제와 같은 역할을, 청년기를 이미 지난 이들에게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젊음, 그리고 청년이라는 대상을 향한 매체의 직·간접적인 고정관념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 청년의 삶은 매체 속에서 재현되는 것처럼 녹록지만은 않다. 지난 7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서 ‘그냥 쉬었음’이라 답한 청년이 44만 3천 명으로 관련 통계를 작성한 후 동월 기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1] 청년 실업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지도 어언 옛날이지만, 문제는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심해졌다. 비단 청년 실업 문제뿐만이 아니다. 청년의 삶은 갈수록 위기에 처해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청년들의 ‘가진 것 없음’은 이들의 불안감으로 직결된다. 한국 청년들은 — 만성적이고 고도화된 — 각종 위험에 처해있다. 위험이 가득한 사회 속에서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찬 청년들은 불안하다.


또한, 청년들은 돈을 이유로 식사나 주거 등 인간의 기본적인 영역을 침해당한다. 이따금 영양가 없는 식사로 그저 끼니를 때우는 데 그치거나 아예 굶기도 하면서, 혹은 몸 하나 겨우 뉠 수 있는 원룸에서 생활하면서 말이다. 이는 포기할 수 없는 다른 지출 — 등록금, 주거, 사회생활 비용 등 — 을 제하면, 가장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지출이 바로 ‘식비’이기 때문이다.[2] 또한, 많은 청년이 거주하는 원룸은 ‘우리 집’을 나와 ‘내 집’을 장만하는 사이 잠시 거쳐 가는 공간으로 여겨지기에 청년의 열악한 주거 환경은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다.[3] 사회는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사는 청년들을 보고 ‘젊어서 할 수 있는 고생’을 하고 있다고 치부한다. 청년은 젊고 건강하기에, 한 끼쯤 먹지 않아도 좁디좁은 집에 살아도 괜찮다고 여겨진다. 청년의 ‘젊음’은 이제 특권이 아닌 ‘착취의 명분’이 되어버렸다.[4]


‘요즘 청년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일부 기성세대의 시각과 달리 21세기 청년들의 눈앞에 자리한 문제는 ‘생존’이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수많은 경쟁을 뚫으며 낙오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청년이라는 단어 옆에 생존주의라는 단어가 자리하는 지금, 나는 청년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이들이 어떠한 특질을 가지든 상관이 없지 않을까 마음을 고쳐먹는다.


청년은 초라하고, 패배하고, 좌절하고, 실패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이유 없이 쉴 수도 있고, 또 쉬어도 되는 존재라고 말이다.


편집위원 민지 | ymj020110aa@korea.ac.kr


[1] ‘그냥 쉬는’ 청년 44만명 역대 최대 (2024.08.18.). 한국경제.

[2] 변진경 (2018). 29.

[3] 같은 책. 91. 

[4] 같은 책. 24.


참고문헌


단행본

변진경 (2018). 청년 흙밥 보고서. 들녘.

 

논문 및 저널

김홍중. (2015).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한국사회학, 49(1). 179-212.

 

기사 및 온라인 자료

‘그냥 쉬는’ 청년 44만명 역대 최대 (2024.08.18.). 한국경제. Retrieved from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81892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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