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하자면, 같은 학교를 다닌 적은 없었지만, 워낙 작은 소도시라 웬만해선 서로 알기 쉬운 작은 동네에서 자랐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때 수학학원 여름방학 특강을 다닌 적이 있다. 우리는 그때 얼굴을 본 게 전부였던 것 같다. 그렇게 전혀 모르고 지낸 건 아니지만, 말 한 번 건네본 적 없는 사이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며, 친구들과 함께 부산의 록 페스티벌에 갔다 오는 길.
고속버스 안, 그가 버스 뒤편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여 그 앞 언저리에 서 있던 나에게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야."
그렇게,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바로 다음날 전화가 걸려왔다.
그즈음, 나는 뉴질랜드로 1년 여 어학연수를 떠나려 학부 4학년 2학기를 휴학해 둔 때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잠시 만나자는 그를 만나러 가까운 카페로 나갔다. 그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서너 명이 함께 나와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우리는 잘 통했고, 그는 다정했으며 매너 있는 섬세함이 좋았다. 매사에 계획적이고 깔끔한 성격에 배려있는 사람이라 제멋대로인 내가 보기에 군더더기 없는 그가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예상에도 없던 연애가 시작이 되었다. 2002년 월드컵을 함께 응원하며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갓 사귀게 된 애절한 순간, 1년여를 헤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반년 전, 내가 호주에 갔다 온 후 내 삶의 큰 변화가 생겼고 긴 시간의 삶의 고됨과 자신에 대한 무기력함에서 자존감 회복의 전화위복의 순간, 기울어진 가정형편이 조금 나아진 시점에 큰 마음을 먹고 6개월의 뉴질랜드와 3개월의 호주 어학연수를 계획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예정된 순간 우리는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동성동본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할, 그리고...
갑작스러운 변수였던 계획에도 없던 연애로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사귀지 말아야 할 혹은 사귀기에 조금 걸리는 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우스운 일일 수도 있겠으나, '동성동본 결혼'은 우리에게 큰 이슈였다. 2002년 당시는 동성동본이었던 우리가 결혼하기에는 너무 험난한 상황이었다. 수년에 한 번 특례법을 시행해 겨우 혼인신고가 가능했던 때였다.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도 등장했던 그 동성동본 결혼 금지법이 있던 바로 그 시절에 우리는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다소 말이 안 되는 그 상황에 우리가 헤어질 뻔한 그 법. 결국, 2005년에서야 그 동성동본 결혼 관련 법은 폐지가 되었다.
사귀면 다 결혼할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기에도 어린 20대 초반이었기에 연애 초반에는 그것이 그리 문제 될 거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성동본 법이 폐지되기 전, 우리 집에서도 한바탕 큰 소란이 있었기도 하거니와 폐지된 후 혼담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결혼 당시 시아버님의 반대가 상당히 심했다. 안타깝게도 아버님은결혼 후에도 나와 결혼한 그가 '양반가문의 종갓집 장손'이라는 이유로 꽤 오랜 기간 '하지 말아야 할 결혼'을 시켰다는 후회를 하시기도 하셨다.
그것이 문제가 되리란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가벼운 만남으로 친구 만나듯 그리 시작된 만남으로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2009년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전 뉴질랜드로 그가 찾아와 한 달여를 함께 지낸 때, 그 후 4학년 2학기 한 학기를 동시에 학교를 다니며 함께 취업준비를 하던 때, 그 후 내가 먼저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대구 시내 이곳저곳을 데이트하던 때, 그리고, 내가 서울로 가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유학 갔다 돌아와 다시 서울에서 일하던 때까지. 그 기간 동안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방도시에 자리 잡고 수년을 일해 오며 늘 고향을 혹은 고향 근방을 지키고 있었다.
읊고 보니 참 오랜 기간 우리는 떨어져 지내며 서로에게 길지 않은 시간을 함께 했던 그야말로 '장거리 커플'이었다.
그러면서 환경에 따라 상황에 따라 바쁜 일상 속 마음으로 곁에 있던 사이었기에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었다지만,결혼은 다른 것이었다.
너무 다른 우리
차이점, 다른 점 투성이었던 우리는 긴 연애기간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 서로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며 이해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해 왔다.
요즘말로, MBTI를 따지자면 그는 Extra J. 나는 Ultra P.
내가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할라치면, 그야말로 무아지경. 몰입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 계획이란 것이 애초에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 가령, 내가 한 고등학생을 가르치던 때의 일이다. 1시간 30분을 계획하고 수업을 시작한 내가 그 학생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느라 얼마의 시간이 지난 줄 모르고 몰입하다 7시간가량이 훌쩍 지난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에 비해 그는 공부든 일이든 시간대비 효율이 가장 중요한 그는 '계획형' 그 자체였기에 그런 나를 이해하기 힘들어했고 많이 서운해했다.
그런 우리가 함께 살며, 아이를 낳고, 함께 일하며 어느덧 결혼 15년 차가 되었다.
결혼 초기, 결혼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나는 그간의 열정과 그것으로 얻게 된 성과를 뒤로하고 고향근방으로 내려온 기쁨은 잠시. 상당한 우울함을 겪었다. 그래서, 더 바쁘게 배우고 일을 시작하고 부산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 둘로 살기에 다소 정돈되지 못한 채 나를 놓치지 않는 삶을 끊임없이 꿈꾸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자라면서 초등학교에 입학 전까지 나는 부부 서로에게 보다 아이에게 더 집중했다.
그리고는 아이가 학교 가던 무렵부터는 나는 일에 거의 몰두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아이가 혹은 나의 남편이 나의 머릿속에는 온통 일밖에 없다고 할 정도.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해
최근에는 그와 나를 돌아보며, 또한 아이와 나, 그와 아이를 돌아보며 우리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지 않은 우리가 어쩌면 숨 쉴 수 있는 다른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아이의 학교와 관련된 핑계로 남편을 두고 아들과 나는 다른 공간으로 분리해 한 학기를 지내게 되었다.
다름을 인정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조금은 떨어져 있으며 그에게도 나에게도 물리적 시간적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말에만 셋이 모이거나 주말에도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아이는 학교를 다니는 평일, 나와 함께. 주말은 아빠와 함께. 그리고 가끔 세 식구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를 돌아보았다.
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는 만 6개월간의 시간을 갖고, 다시 같은 공간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제는 예전처럼 복잡하지 않고 다름의 미학을 인정하고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