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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Nov 23. 2023

역사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싶다

-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세상에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나쁜 놈한테 개자식이라고 말하고, 정의로운 사람한테는 좋은 분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게 이미 역사적으로 규명이 된 거라면 더 말할 나위 없죠. 나쁜 놈이 한 짓을 후대의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교과서에 수록하고, 논문으로 냉정하게 평가를 내리는 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반드시 후세를 위해서 해야 할 당위적인 과제이기도 하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제 영화관으로 <서울의 봄>을 보러 간 건 역사적 현장을 참관하려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영화를 보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어떤 여운이나 울림이 없었습니다. 팩션 형태였지만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수도경비사령관인 장태환의 대립을 극적 테마로 삼은 건 누구나 알 수 있었죠. 영화를 보는 내내 스토리의 흐름이 너무 시원해서 마음을 졸이고 보지 않아도 됐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큐멘터리에서 몇 번씩 봤고, 제5공화국 드라마를 통해서도 익숙해진 스토리였으니까요. 프로타고니스트 이태신(정우성)은 반란군에 맞서 정의를 수호하려다 안타깝게 좌절한 비극적 인물이고, 안타고니스트 전두광(황정민)은 정권에 눈이 먼 나쁜 놈의 화신이란 걸 다시 확인했을 뿐이죠. 

  영화관에서 <서울의 봄>을 보고 나와서 겨울 햇살을 맞으며 한참 걸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내가 본 건 무엇인가? 모순과 왜곡된 한 시대를 고발하고자 한 메시지를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는 고약한 관객인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서울의 봄>을 보고 느낀 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글로벌한 K컬처가 맹위를 떨치는 요즈음 <서울의 봄>이 지구촌 관객들에게 얼마나 어필을 할 수 있을까? 70년대, 튀르키예의 정치적, 사회적 모순을 폭로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Midnight Express)와 엘 살바도르의 대통령 부정선거에 맞서 순교한 오스카 로메로 신부의 삶을 그린 로메로(Romero)가 떠올랐습니다. 그 두 편의 영화가 우리에게 진한 감동과 교훈을 준 건 맹목적인 정의 제일주의가 아니라 극적인 사건을 촘촘하게 엮은 구성과 그 뼈대에 섬세한 연기로 살을 붙인 캐릭터에 기인합니다. 투르키예와 엘 살바도르의 정치적 상황을 전혀 모르고 영화를 보아도 그 사회를 한 번에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두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느낌은 나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과 그 동시대를 아무렇지 않게 호흡하고 있었다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둘째, 악한의 캐릭터를 좀 더 매력적으로 만들 수는 없는 걸까요? 흔히 작은 이야기로 큰 감동을 주고, 큰 감동은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전두환과 겹쳐지는 이미지 때문에 악한 전두광은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해도 무방한 정형화된 캐릭터였습니다. 악한의 캐릭터한테도 영화 속에서는 미덕을 가진 부분이 있기 마련이죠.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는 일제 강점기, 해방 혼란시기와 미군정 시대, 6.25 이후까지 잘 먹고 잘 산 인텔리입니다.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대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독자의 머릿속에서 패배합니다. 단순한 매국노가 아니라 그의 인간적 고민과 궤적까지 모조리 부정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게 매력적인 악인 캐릭터의 아이러니입니다. 전두환이 아니라 전두광이라고 한 건 캐릭터라이즈가 된 거죠. 그건 역사적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여, 고발을 뛰어넘은 영화적 메시지를 확장하려는 의도였을 겁니다. 그 악한의 전형이 이루어졌는가는 아쉽습니다. 전두광한테서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살기등등한 전투력만 보였지 악한의 섬세한 호흡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해야 할 고민의 몫은 없었습니다. 그냥 보여주는 대로 보면 그만이었으니까요.



  셋째, 그 많은 인물을 다 보여줘야 했을까? 감독은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자신이 맡은 몫을 해낸 모든 조연을 관객의 마음속에 각인시키고 싶었을 겁니다. 연기자도 당연히 그랬을 터이고요. 더구나 12. 12 사태 때, 우유부단한 행동을 한 정치 관료가 있었는가 하면 장렬하게 죽음을 맞은 군인들도 있었다는 걸 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겠죠. 그런데 너무 많은 등장인물은 관객들의 몰입감을 떨어뜨리고, 집중력도 분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일어난 단 9시간의 사건 속에 수십 명의 인물을 다 보여주기보다 극적으로 압축된 캐릭터 몇 명만 보여주는 게 훨씬 더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장관의 공관을 떠나 한미사령부로 피신한 국방부장관과 당시 강골이기보다 유약했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면모를 좀 더 섬세하게 보여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몇 씬 안 되긴 했지만 국방부장관(김의성)의 연기는 뇌리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동물적인 생존 감각을 그의 깨알 같은 대사와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보여준 건 압권이었습니다.          

   


  넷째, 전두환과 노태우는 친구이면서 정치적 동지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극과 극에 가까웠죠. 그들의 정치적인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좀 더 천착해서 내면의 갈등과 고민도 동시에 보여줬더라면 인간적인 악한이 좀 더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신군부가 목숨을 걸고 거사를 벌인 9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손익 계산을 따지고,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비상문은 또 어떻게 준비했을까요. 마치 바위에 꽂힌 칼을 뽑은 원탁의 기사인 양 닥치고 진격만 하는 전두광을 통해서 내린 결론은 ‘결국은 돌대가리였군’이었습니다. 결론이랄 것도 없이 동의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관객이 고민할 거리가 전혀 없었다는 건 조금 싱거운 이야기입니다.



  다섯째, 작가가 소설을 쓰거나 감독이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를 만들 때, 소재주의에 매몰되면 그건 독약입니다. ‘너희는 이런 거 모르지?’ 하는 소재주의가 주는 쾌감은 짜릿하지만 그게 얼마만큼 감동으로 환원되느냐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더구나 영화적 재현이 역사적 현재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서울의 봄>이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면 성취도, 실패도 아닌 의무감 하나만으로도 거룩한 일이었겠죠. 하지만 어떤 관객들은 원한도, 복수심도, 이념도 아닌 문화적 사치로 영화를 보러 영화관으로 갑니다. 시간과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그게 잘못된 걸까요?          


    ※  제가 본 김성수 감독의 최고 영화는 <비트>와 <태양은 없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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