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쿵하게 만드는 상대에게 마음이 간다는 건 관심입니다. 관심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 아래는 차가운 눈빛도 함께 합니다. 뜨거운 열정이 한순간에 실망과 배신으로 바뀌기도 하는 거죠. 그러니까 가슴이 뛴다고 그게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견뎌내어, 상대의 시시함도 단점도 다 포용합니다. 운명적으로 만났다는 표현은 욕망을 덧칠한 말장난이기 쉽습니다. 격렬한 열정이 격렬한 종말로 끝나는 거, 정말 많이 봅니다. 이젠 얘깃거리도 아니죠.
오랜만에 사람 향내가 나는 아날로그 로맨스 영화를 봤습니다.
<1초 앞 1초 뒤>.
일본의 전통과 역사적 숨결이 느껴지는 교토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부터 남보다 1초 빠른 행동을 하는 버릇이 있는 하지메(오카다 마사키)와 다른 사람보다 1초 늦게 움직이는 레이카(키요하라 카야)는 초등학교 시절 절친이었습니다. 레이카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하지메는 깁스 위에다 두 사람의 이름을 쓰죠. 그건 늘 함께 하겠다는 서약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연락이 끊긴 채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죠. 레이카는 사진을 찍고, 하지메는 작은 우체국 창구 담당직원으로 근무하지만 툭하면 놀림거리가 되는 게 일상입니다. 그러다가 버스 사고로 인해 우연히 그 현장에서 레이카는 하지메를 보게 되고, 그즈음 하지메는 버스킹을 하는 사쿠라코(후쿠무로 리온)한테 혼을 빼앗겨 미망 속에서 헤매게 됩니다. 하지메의 마음은 하루하루가 애드벌룬처럼 붕 떠있었지만 사쿠라코는 하지메로부터 돈을 챙기는 게 목적이었죠. 그때, 레이카가 하지메에게 다가섭니다. 그리고 레이카에게 우주가 그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하루의 시간을 선물해줍니다. 아니 어쩌면 황도를 걷는 태양의 걸음이 그렇게 느린 건지도 모르죠. 사람이 빨리 걸었을 뿐. 어쨌든 그 시간이 하지메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었지만 결국은 레이카와의 추억을 현실로 부활시켜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느낌, 몇 가지를 정리해 봅니다.
첫째, 단순한 타임리스 영화가 아닙니다. 하지메가 파출소를 찾아가 경찰에게 “어제가 사라졌어요. 하루를 잃어버렸어요.”라는 오프닝 씬의 대사는 초시간적인 서사에 대한 암시가 아니라 잃어버린 하루가 갖는 의미를 담아낸 극적인 장치였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메한테는 잃어버린 망각의 시간이 레이카에게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기적의 시간이 되는데 그건 그냥 주어진 게 아닙니다. 레이카의 이름을 쓸 때, 남보다 몇 초 더 걸렸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만기가 된 적금처럼 우주로부터 돌려받게 된 겁니다. 자기 몸을 저며 초승달이 빛을 내다보면 그 빛이 쌓여 보름달이 되는 이치라고나 할까요. 남보다 1초 늦게 행동한 건 굼뜬 게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였던 게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그걸 하늘이 알고 다 돌려준 거죠. 레이카도, 버스기사도, 하지메 아버지도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유치할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아이디어가 참 좋았습니다.
둘째, 하지메와 레이카의 로맨스는 디지털 방식이 아니라 아날로그 방식의 사랑입니다. 디지털은 정확하고, 효율성이 높지만 명멸하는 현재만 존재합니다. 과거와 미래가 어떤지 알 수 없고, 현재의 순간만 있을 뿐이죠. 이에 반해 아날로그는 부정확하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동시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전체 속에서 부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볼 수 있죠. 아날로그를 자연적 혹은 인간적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레이카가 늘 들고 다니는 사진기도 낡은 니콘이었고, 그 사진 속에 담긴 스토리는 과거와 현재가 단절된 게 아니라 미래를 향해 계속 진행돼 가는 중인 것으로 보아야겠죠.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 영화가 사람 냄새풍기는 아날로그 로맨스인 건 분명합니다. 이런 스토리가 이해불가능한 사람, 너 없인 못살아, 했다가 너 때문에 못살아로 쉽게 변하는 세대한테는 사랑은 추억이 아니라 기분 나쁜 경험으로 남는 게 당연합니다.
셋째, 레이카가 우체국 창구에 앉아 있는 하지메에게 찾아와 우표를 딱 한 장씩만 사가지고 돌아갑니다. 두 번째 나타났을 때, 중요한 극적인 캐릭터이겠다 싶었는데 세 번째까지도 그냥 우표를 사갑니다. 그리고 네 번째에서야 레이카의 얼굴을 카메라가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더구나 어릴 때 약속했던 하지메의 사서함으로 보내는 편지에 붙이는 우표였던 거죠. 열 장씩 한꺼번에 사는 게 아니라 한 장, 한 장에 마음을 붙이는 것. 이 정도면 약을 파는 정도를 뛰어넘어 지리게 만드는 거죠. 어쨌든 작은 소품에도 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감득이 됩니다.
넷째, 레이카가 사쿠라코의 속셈을 알고 그녀의 얼굴에 물을 끼얹는 장면은 시원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에 대한 모욕 이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부족을 한방 먹인 거죠. 그로써 사쿠라코의 계획은 실패하고, 하지메의 잃어버린 하루가 시작되는 거죠. 사쿠라코와 데이트를 약속했던 사라진 일요일. 처남 미추루(유튜브에서 본 시미켄)가 챙겨준 콘돔은 써먹지도 못했죠. 우체국에 출근한 하지메의 얼굴이 벌겋게 그을려있고, 이어서 우표를 사려고 온 레이카의 얼굴도 벌겋게 그을려 있었죠. 아마노하시다테(天橋立)로의 여행으로 둘 다 얼굴이 햇볕에 그을렸던 겁니다. 기적의 시간과 여행, 그리고 얼굴이 그을려 우체국으로 되돌아온 장면의 편집이 자연스러워 좋았습니다.
다섯째, 모든 사람이 멈춰있는 교토의 거리에서 레이카가 스피커맨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길을 달리는 모습을 카메라가 부감하면서 교토의 모습을 풀샷으로 찍은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타이틀 롤과 함께 청수사의 이미지가 떠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고옥들이 즐비한 니넨자카와 먹을거리가 풍성했던 산넨자카. <1초 앞 1초 뒤>는 교토까지 함께 묶어서 파는 문화상품이었습니다.
여섯째, 한때 한국 문단에서 트리비얼리즘을 지양해야 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습니다. 본질에 대한 탐구없이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수사학적인 태도를 지적한 것이었죠. 하지만 문학이나 영화에서 디테일한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히려 감동은 디테일에 있기도 하죠. <1초 앞 1초 뒤>가 과학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가 감득이 되는 건 감성적인 논리와 탄탄한 구성, 매력적인 캐릭터, 그리고 디테일한 장면 때문입니다. 핍진성이나 실제 여부가 아니라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그게 스토리텔링의 힘이죠.
사족 – 말랑말랑하고 달달한 서울 스토리나 혹은 경주 이야기가 나올 때는 언제일까요?
(춘천 CGV에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던 그 청년이 이 리뷰를 읽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