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그려내는 도시는 차갑다. 잿빛의 콘크리트 건물들과,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이 뿜어내는 뿌연 매연으로 가득한 도시. 도시의 번잡함은 활력으로 느껴지지 않고, 화려한 네온사인의 선전 문구도 공허하기만 하다. 그 아래,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산다.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주)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배급.
영화의 두 남녀 주인공 아룽과 수첸은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오랜 연인이다. 애정과 연민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부유하는 관계는,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위태로워져만 간다.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주)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배급.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학대당하며 자라온 수첸에게 이 도시는 지긋지긋하기만 하다. 안식처도, 도피처도 없는 이 도시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지만, 결국 그녀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실함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건실히 살아온 아룽에게도 현실은 감당하기 쉽지 않다. 공허한 이상은 현실의 족쇄 앞에서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 뿐이다.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주)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배급.
1985년의 타이페이에서 2022년의 서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도시의 삶: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다소 진부한 소재를 이렇게 처절하고 지독하게 잡아낸 영화가 또 있었던가.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주)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배급.
수많은 영화들이 소비되고 사라지는 시대에 한 편의 영화가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별처럼 빛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 영화가 사회와 시대의 충실한 거울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클래스는 영원하다.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주)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배급.
영화의 시선은 시종 아래를 향한다. 우리는, 머리에 이상을 이더라도, 결국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