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무가 많은 길을 걷는 걸 좋아한다.
등산은 너무 힘들기도 하고 필요한 장비가 많아 싫고,
신발만 편하면 언제든 걸을 수 있으니 일부러 나무가 많고 예쁜 길을 찾아다닌다.
월정사 전나무 길이나,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 소쇄원 대나무 숲,
그 밖에도 그냥 나무가 많은 길은 무조건 걷는다.
광릉수목원도 무척이나 좋아한다.
오래돼서 그런지 다른 수목원에 비해 규모도 크고 나무도 훨씬 많고 울창해서 짙은 녹음이 좋다.
수목원 내부의 산책로는 또 얼마나 운치 있는지...
요즘은 다들 자가용으로 한 번에 편하게 갈 테고,
수원에 살고부터는 못 가봤으니 대중교통도 얼마나 편리한 노선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전에는 전철을 타고 청량리까지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다. 꽤 긴 노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남편과 연애시절 광릉수목원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황당한 일이 있었다.
밥을 먹고 버스를 탔는데 나는 식곤증에 너무 졸려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버스 맨 뒷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버스에 타고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젊은것들이 버스에서 붙어 앉아서 기대어 잠을 잔다고 혼을 내셨나 보다.
1990년대니 지금보다 모든 것이 엄격했지만 어깨에 기대어 잠자는 게 욕먹을 행동은 전혀 아니었는데,
그 할아버지가 너무 완고하신 건지 기분 나쁜 일이 있으셨던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버스에서 큰소리로 남편을 엄청 나무랐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꿀잠을 잔 것인지 그때 일어난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소리소리 지르고 요즘 젊은것들 운운해 가며 혼내시고 버스 안에 사람들은 다 우리를 쳐다보는데
옆에 잠들어 있는 나는 깨어날 생각도 안 하니,
남편이 얼마나 황당하고 난처했을까 생각만 해도 땀이 삐질삐질 난다.
나중에 남편은 날 보고 아니 할아버지가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걸 모르고 잠을 계속 자냐고 신기해했다.
혹시 깼는데 창피해서 모른 척 한건 아닌지 살짝 의심까지 했다.
왜 깨우지 않았냐니까 자기 혼자 창피하면 됐지 깨우면 나까지 민망할 것 같아 그냥 뒀다고 한다.
잘못한 게 없으니 초반에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나 보다고 짧게 설명하고 별 대꾸하지 않았단다.
남편도 참 대단하다.
전처럼 왕성하게 일하지도 않고, 나이도 드니 점점 잠도 줄고 수면의 질도 떨어지는 요즘,
20년도 훨씬 전에 그 버스에서 세상모르고 빠져들었던 달콤한 낮잠을 다시 한번 자고 싶다. 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