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유독 상처를 받는 당신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찐친'들은 "꿈 깨."라는 말을 자주 사용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라.' 그러니까 가능성이 낮은 경우의 수를 두고 고민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찾으라는 참으로 T적인 조언이다.
보통 드라마나 소설, 영화 등에서 주인공을 만류하는 대사, 그리고 그것을 무릅쓰고 역경을 이겨내 어떠한 목표를 이루어내는 성공기는 거의 공식화된 플롯이겠다. 저런 '꿈 깨'류의 대사는 악당들도 많이 사용한다. 흔한 히어로물에서는 어휘와 상황만 다를 뿐 '꿈 깨'류 대사가 클리셰로 잡혀있다. 가령,
"크하하하핫. 여기까지다 한국어맨! 이제 지구는 영어와 중국어로만 가득하게 되고, 이 학습자들은 모두 대마왕님을 위해 일하는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그만 둬! 설령 다른 언어를 배우게 되더라도 우리는 절대 지구를 넘겨줄 수 없다!"
"허황된 꿈은 집어쳐라, 한국어맨! 이제 한국어를 배우려는 자는 지구 상에서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너의 12시간 시수도 이제 끝이다! 크하하핫!"
"한국어를 단 한 명이라도 원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자, 간다아앗!"
'꿈 깨'류 대사는 애초에 다른 사람의 희망에 초를 치는 말이라 부정적으로 인식이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간혹 한국어 교재에도 이러한 대사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유학을 하러 한국에 왔다가 다른 친구들이 힘을 주기는커녕 많이 힘들면 돌아가지 그러냐고 하질 않나. 소개팅 자리에 다녀왔는데 여자가 거절하는 시그널을 읽지 못해서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소리를 하지 않나. 조심스럽게 말하는 경우도 있고, 매정한 버전도 있다.
'꿈 깨'라는 말은 사실 말하는 입장에서는 대단한 각오를 하고 해 줘야 하는 말이다. 각종 콘텐츠에서는 무심하게 하는 악담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진심어린 충고로써 해 줘야 하는 경우라면 듣는 사람이 받을 고통을 걱정해야 하므로 훨씬 더 큰 각오를 가지고 해야 하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관계가 나빠질 각오도 하면서 말하는 경우도 있다. 현명한 자는 그렇게 말해도 이 친구가 충언대로 안 따를 걸 알면서도 말하기도 한다. 사실 '꿈 깨'는 정말 친구를 위하는 말인 경우가 많다.
기대는 사람을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한다. 나는 음식점에 갈 때마다 되도록 아는 맛을 먹으려고 하지만, 얼마 전 타향살이를 할 때는 거의 매일이 기대의 연속이었다. 원치 않는 기대를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나는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마다 스릴을 맛 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은 천국에 가는 것에 성공했지만 지옥도 맛보았다. 재료와 사진을 보면서 유추해 가면서 이것은 맛있을 거야, 그런데 아니면 어떡하지. 이것은 절대로 안 되는 조합인데, 이게 맛있을까 과연? 나중에는 기대를 넘어서서 아노미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사진에 속는 경우는 소개팅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나는 그래서 예전에 소개팅을 시켜줄 때 절대로 사진을 먼저 보내주지 않았다. 왠지 사기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먼저 주면 한껏 조작된 사진에 기대치 도파민이 폭발하여 나갔다가 새벽 1시쯤 술먹고 주선자인 나에게 전화가 온 경우도 있어 사진을 절대 사전에 주지 않았다.
약속은 어떠한가. 사실 남자끼리의 약속은 고도의 첩보전이다. 네 명이 몇 월 며칠 오후 4시에 만나기로 했다면 먼저 도착한 자가 지는 게임이다. 전화나 문자로 어디냐고 열심히 쪼아대는 이가 실은 집에서 아직 침대에 누워있을지 누가 알까. 안 오는 놈은 다 끝장을 내겠다고 하던 친구가 그날 약속을 파토내기도 한다.
학생들 중에서도 유독 기대를 많이 하는 학생들이 있다. 순수한 것인지, 아니면 기대에 반동하는 충격에 익숙하지 않은 병아리인지. 그중에 제일 곤혹스러운 학생 유형은, 본인이 평소에 한국어를 아주 쩔게 잘한다고 생각해왔다가 막상 시험을 보고는 망해서 항의하듯 바라보는 유형이다. 처음에는 분노, 의심에 접어들며 시험지 열람을 요청한다. 그다음에는 현실부정, 그리고 채념. 그리고 학기가 끝날 때즈음 기대가 과했다는 것을 알고 유급을 받아들인다. 이 학생이 3급 학생이면 이즈음에 아르바이트로 눈을 돌리는 학생이 많아진다. 월급은 기대한 만큼 꼬박꼬박 성과가 눈앞에 나오니까.
나는 요즘도 과한 기대에 두세 번씩 브레이크를 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조심스러워진 지 수 년이 흘렀다. 거절당하더라도 잠깐 오는 좌절감은 말그대로 잠깐이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생각한다. 내 기대가 기준치 이상이었어. 다시 돌아와라. 이번 건 너무 올려놓은 탓이야.
이제는 잔소리를 듣기보다는 해야 하는 위치와 나이가 되어 내 자신에게 '꿈 깨'를 자주 외치게 된다. 상상하기 좋아하고 만약을 좋아하는 나는 그것이 더욱 필요하다. 내가 꽃밭에 나아가 마냥 유토피아를 꿈꾼다면, 그 목을 살짝 두 손으로 잡고 돌려 현실쪽을 바라보게 하는 것도 이제는 내 손으로 해야만 한다. 기대치의 온도는 너무 올려 놓으면 결국 금방 난방이 풀려버리고 싸늘해진다. 하얀 김이 내 입에서 뿜어져 나올 때 괴로워하기 보다는 에너지 절약을 하듯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평온하고 안락해지고 싶다면 스스로 훈련하듯 적절한 기대치를 유지하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