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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써니 Feb 19. 2022

Welcome to New York (1)

날 기다렸다면서요.

  무언가를 위해 계획을 세운 후에 매번 깨닫는다, 현실은 종종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여행 역시 아무리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한다고 한들 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고는 한다. 물론 그 상황 자체는 긍정적일 결과를 가져올 수도, 혹은 부정적일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적어도 캐나다에서의 교환학생을 마치고 떠나기로 한 미국 여행에서 발생한 예기치 못한 일이란 바로 철저한 계획을 짜두었던 당사자가 여행에 함께 가지 못하게 된 초유의 사태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겠다.


  2021년 12월 21일, 함께 뉴욕으로 떠나기로 한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코로나 변이가 너무 심각해져서 못 갈 것 같아."


  한 학기만 파견되어서 이번 여행을 끝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계획한 나와는 달리 1년 파견을 선택한 친구는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나 코로나로 인해서 캐나다로 돌아오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고 결국 여행 이틀 전에 취소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 것이었다.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서 갈 수 있을까?'


  아무리 캐나다에서 지내면서 조금이나마 해외에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한들, 미국은 또 다른 나라. 코로나 19라는 예기치 못한 질병이 닥친 그곳에서 과연 나 혼자서 여행을 끝마칠 수 있을까? 이렇게도 겁이 많은 내가 말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은 새로운 인연을 가져다주었다. 마침 같은 학교로 교환학생을 와있던 친구의 친구는 여행을 취소하지 않았고 서로의 상황을 확인한 우리 둘은 토론토에서 얼굴 고작 한 번 본 상태로 말도 놓지 않은 채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뭐 어색하다고 해도 뉴욕 한복판에 혼자 던져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처음이지만 아닌 것처럼


  피어슨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의 창 밖으로 듬성듬성 녹지 않은 눈이 남아있는 토론토가 내려다 보였다. 아침 9시 비행기, 적어도 새벽 5시에는 집에서 나와야 했지만 잠을 자기는커녕 밤을 새 버렸다. 내려앉는 눈꺼풀만큼이나 무거운 몸을 어기적대면서 두 개의 캐리어를 낑낑거리며 챙겼다. 마지막으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창밖과 대비될 정도로 밝은 형광등 불빛이 비추는 나의 방을 돌아보았다. 고작 4개월에 불과한 기간이었지만 너무나도 많은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해 줬던 나의 방, 단조로운 흰 벽에 조그마한 책상 그리고 뜬금없이 벽 한편에 걸려있는 TV가 부조화를 이루는 이곳에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뉴스에서는 유난히도 이번 겨울이 따뜻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토론토에 있으면서 그렇게 추워서 죽을 것 같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내가 떠나고 나서인 1월이 돼서야 폭설과 강추위가 몰아닥쳤다고 하니 정말 추위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로서는 아주 운이 좋았던 것이다. 토론토의 그 악명 높은 추위가 덜했기에 1시간 30분 남짓 동남쪽으로 날아가야 하는 뉴욕은 더욱이나 온화한 날씨였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뉴욕에 도착한 첫날, 높게 솟아오른 빌딩의 숲과 대비될 정도로 차가운 푸른 하늘과 고요히 흘러가는 새하얀 구름은 예기치 않게 삐그덕거렸던 여행에 다시금 설렘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우여곡절 끝에 부른 우버가 오고 맨해튼으로 향하는 길, 기사 아저씨는 나에게 어디서 오는 것이냐며 물었다. 토론토라 답했다. 아저씨는 토론토에 가보고 싶다며 거기 정말 춥지 않냐며 대화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짙은 인도식 억양이 어려워 알아듣기에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그렇다며, 정말 추운 곳이지만 좋은 곳이라 대답했다. 이윽고 뉴욕에는 몇 번째 방문이냐는 질문이 떨어졌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왜 그랬을까. 혹시나 처음이라고 하면 무시당할까 봐? 회갈색의 빌딩 숲에 서식하는 수많은 포식자들이 손쉽게 노릴 수 있는 먹잇감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머릿속에서 남몰래 행해지는 상상놀이에 빠져서 스스로를 뉴욕에 많이 와본 어딘가 좀 있어 보이는 유학생 캐릭터라고 설정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대답의 저의가 어떠하든 간에 그 순간 가장 확실했던 것은 뉴욕을 향한 기사 아저씨의 사랑이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든지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질 거라며. 퍽이나 신기했다. 나한테 서울은 물론 애정 깊은 도시임과 동시에 애증이 가득한 도시인데. 이 사람은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저렇게 열렬하게 자신의 도시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애석하게도 아저씨를 사로잡지 못한 뉴욕의 구성요소는 바로 교통체증이 아니었을까? 좁디좁은 도로를 꽉 매울 만큼 차량만큼이나 수많은 무단횡단자와 귀를 울리는 경적소리 그리고 창문을 내린 채로 고레 고레 소리 지르는 욕설을 뚫고 나서야 마침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뉴욕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전도하던 남자는 친절하게도 무거운 짐을 대신하여 모조리 옮겨준 후 떠났고 뉴욕에 한 번도 와본 적 없으면서 마치 여러 번 온 것처럼 행동하는 거짓말쟁이는 부랴부랴 짐을 풀고 존댓말을 반말로 바꾸기 위해 타임스퀘어로 나섰다.

창 밖에 보이는 구름의 개수만큼이나 기사 아저씨는 뉴욕을 사랑할 이유를 많이도 말해주었다.


타임스퀘어 한복판에서 강남역을


  다시 말하지만 여행 직전 예기치 못한 일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작 여행 두 달 전에 미리 구매하고 개통까지 해놓은 미국 유심이 정작 공항에 도착하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와이파이를 찾아 꾸역꾸역 우버를 부르고 기사 아저씨와 대화가 끊겨 적막해질 때는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 공기계에 다름없는 화면을 공허하게 들여다보게 된 것은 그다지 당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단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타임스퀘어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의 여행사 사무실을 들러야 하는 귀찮은 행위가 계획에 추가된 것에 불과했다. 정말로.


  서울의 많은 장소에서 친구들을 기다려보았다. 주로 학교 앞 지하철 역 출구였지만 가끔은 강남이거나 혹은 이태원, 신촌, 홍대와 같은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뉴욕 한복판, 타임스퀘어에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게 될 줄이야. 정확히는 기다리게 할 줄이야. 그것도 아직 친하지도 않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의 사람을. 휴대폰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타임스퀘어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우리는 타임스퀘어의 커다란 리바이스 전광판 밑에서 만나 존댓말에서 반말로 관계를 정정하고 늦은 점심도 함께 먹었다. 뉴욕 여행이 마침내 제대로 시작된 참이었고 뉴욕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타임스퀘어를 뒤덮은 눈이 부신 것을 넘어 조금은 정신 사나운 전광판을 배경을 사진을 찍고 있던 참이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황당한 일은 나름 꽤나 겪었다고 생각했지만 늘 예상을 빗나가는 사건은 발생하고 만다. 솔직히 처음에는 뉴욕 한복판에서 듣는 한국어가 퍽이나 반가웠다. 사진을 찍고 있던 우리에게 친절한 미소를 뛴 노년의 남자가 한국사람이냐며,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건넨 말이 한국어였으니까. 사진을 찍어주던 중 그분의 옆에는 어느새 비슷한 연령대의 여인이 서있었다.


  '뉴욕에 사는 한인 노부부일까?'


  아니요, 당신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휴대폰을 건네주면서 질문한 단 한 문장으로 인해서.


  "혹시 두 사람 교회는 다니시나?"


  아뿔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우리는 뉴욕 한복판에서 몇 분간 성경에 나온 구절을 질리도록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이번에도 순식간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네!"


  질문에 대한 긍정. 정말이지 뉴욕에 와서 양치기 소년이라도 된 건지 물꼬를 튼 거짓말이 어느새 두 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거짓말이 무색하게 어느새 3명으로 늘어난 뉴욕의 십자군에 이끌려 우리 둘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해야만 했다. 삼성 갤럭시를 광고하는 거대한 스크린 아래에서. 그러자 순식간에 뉴욕은 익숙한 장소로 변했다. 그날 아침 11시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제대로 둘러본 시간은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방금 벌어진 일은 너무나도 강남역에서 마주할 수 있는 풍경과 비슷했기에. 적어도 다행인 점은 기도가 끝나고는 순순히 우리를 놓아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둘러 길을 건넜다. 그리고는 디즈니 스토어에서 30분 간 나오지 않았다. 혹여나 다시 마주쳐 더 곤란해질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십자군을 피해 숨어들었다.

  좋든 싫든 간에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여행에 대해 이야기해줄 때 가장 끝내주는 일화가 생겨버렸다고. 차디차 보이는 고층 빌딩이 가득한 어떤 도시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남들에게 전도하는 사람과 내 거짓말의 원죄를 용서해줄지도 모르는 한 남자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먼 타국 땅에서도 전도하는 사람들을 만났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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