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섬김의 경험
지난번 단순 몸살이라 여겼던 두통과 열감은 코로나가 맞았다. 증상이 나타난 지 이틀 뒤 다시 자가진단 키트를 해보니 양성이 나왔다. 그날로부터 6일간의 격리가 시작되었다.
사실 자가진단키트의 선명한 두 줄을 보고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제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이 예전보다 덜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코로나에 걸릴까 걱정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벗어나 마스크를 벗고 해외에 살아서인지, 아니면 이제 안 걸렸던 사람이 더 적을 정도로 한 번씩 훑고 지나가서인지. 그렇게 무서워했던 코로나가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결국은 걸렸구나, 이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난 집순이인 나는 종일 방에 머물 핑계가 생긴 것이 오히려 조금 반갑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수강정정기간의 첫 수업을 하나도 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수업을 들어보고 몇 개를 드랍하려던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확진이 되자마자 교수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메일을 썼다. 이렇게 한 학기 내내 힘든 수업을 듣게 된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의 계획서만 보고 고른 수업이 괜찮은 수업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문제는 밥이었다. 기숙사는 샤워실과 화장실, 주방이 모두 공용이고, 방에 먹을 것은 없었다. 확진이 된 첫날은 아침부터 한 끼도 먹지 못하고 버티다가 저녁에 겨우 언니 오빠들이 해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다음 날부터 코로나 확진자들을 위한 식사 배달이 시작되었다. 이건 코로나에 걸렸기에 할 수 있었던 너무나도 감사한 경험이었다. 한국에서 다니던 우리 대학에서 총 열 명이 부다페스트로 교환학생을 왔고, 그중에 나를 포함한 네 명이 확진되었다. 우리는 그 기간 동안 마트를 갈 수도, 주방에서 요리를 할 수도 없었기에 누군가 식사를 챙겨주지 않으면 밥을 먹기 힘든 상황이었다.
감사하게도 코로나를 피한 나머지 언니 오빠들은 우리의 격리 기간 동안 하루 두 끼 식사를 매일 요리해서 가져다주었다. 영양소까지 골고루 챙겨 만들어 준 따뜻한 식사였다. 덕분에 몸이 아픈 기간을 어느 때보다 잘 챙겨 먹으며 보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한지를 느끼는 계기였다. 생각해보면 그저 대학 선후배 관계일 뿐인데. 아무도 부탁하거나 시키지 않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를 위해 매 끼니를 정성스레 챙겨 주던 그들의 따뜻함은 잊지 못할 것 같다.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 않지만 가끔은 훨씬 어른 같고 배울 점이 정말 많다고 느낀다. 이렇게 대가 없는 섬김을 받을수록 나도 다른 사람들을 기쁜 마음으로 섬길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남에게 빚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겪으며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사람들은 결국 서로 빚지고 갚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도움받기 싫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순간에 내게 내밀어지는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감사한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갚을 기회가 왔을 때 나도 기꺼이 도움을 주는 것. 우리 엄마 말대로 이런 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배워서 남 주자." 우리 대학의 표어이다. 나도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남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 역시 배워서 남 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이타심까지는 아닐 것이다. 대단한 의지나 숭고한 정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섬김의 정신은 내가 그러한 섬김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내가 받은 것이 있기에 나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겠다고, 그러고 싶다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따뜻한 섬김은 흘러간다. 흘러서 점점 퍼져 간다. 그 온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흩어져 살아가도, 그 시절에 받은 소중한 섬김을 잊지 않고 나도 누군가를 섬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