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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칙칙폭폭 Jul 22. 2023

뮤지컬 <멤피스>를 보고 (feat.웨스트사이드스토리)

인종차별극복 스토리의 콘텐츠를 수입하는 것에 관하여

뮤지컬 멤피스가 한국에서 7월 20일 막을 올렸다. 흑백분리정책이 강력히 시행되던 1950년대 미남부 멤피스를 배경으로, 음악으로 인종차별을 넘어보고자 한 이야기라고 소개하고 싶다.

휴이와 펠리시아

흑인음악을 사랑한 백인 휴이와 그의 디바인 흑인 펠리시아의 배역은 당연한 듯 둘의 사랑이야기로 연결되지만 휴이는 더 큰 걸 꿈꾼듯하다.  ‘사랑의 힘으로 인종차별을 넘어보자’의 레퍼토리는  <웨스트사이드스토리>를 떠올리게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취향인 것인지 둘 다 동일한 제작사에서 수입했다.


<웨스트사이드스토리>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마리아’와 백인 ‘토니’의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극의 플롯은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전(classic)이라고 칭찬받을 수 있는 한편, 한국인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에 대해 과연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얼마나 진정성을 가질 것인가 하는 한계점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극을 통해 푸에르토리코 여성배우가 주류 문화권에서 말하고 등장할 수 있도록 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과 이를 성취해 낸 자부심 등도 이 극의 인기와 명성에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문화권에 대한 관심은 어느 한편으론 그들이 타자이기에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인종차별의 문제를 다룰 때 다른 인종임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선 크게 빨간 계열과 파란 계열의 의상으로 표현했지만, 행여라도 거기에 어떠한 다른 선입견적 요소(예를 들어, 백인은 깔끔하고 단정한 차림새, 이민자는 지저분하고 자유분방한 차림새)가 들어가도 불쾌해진다.


같은 얼굴의,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인 배우들이 두 파로 나뉘어 이 대립이 인종차별 때문이라는 것을 말로 설명하는 데는 확실한 한계가 있다. 이들이 아무리 "Te adoro(사랑해)", "Vamos(가자)"를 말 끝마다 붙인다고 해도 말이다. 극의 플롯에서 드러나는 대립이 인종차별적 사건이라고 느껴지기보다 혈기왕성한 10대들의 편 가르기 패싸움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대립의 중심에 있는 사건은 토니와 마리아의 사랑 때문인데, 잘 생각해 보면 이들의 사랑의 모태가 된 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태규와 캐퓰릿은 인종이 다르지 않았지만 서로를 미워한다. 다시 말해, 같은 인종이어도 충분히 혐오가 생기거나, 대립이 생길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층 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인종차별을 넘어서 모두를 사랑으로 대하자'라는 본래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토니와 마리아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만 남게 된다. 본래의 작품의 의미에서 반쪽짜리가 된 것이다. <웨스트사이드스토리>를 볼 땐 이러한 재현 문제, 혹은 그 작품의 상징성을 살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토니와 휴이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인종차별이 장벽이 되어, 이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내가 본 토니는 사람이 죽어나가도 마리아만 자신을 봐주고 사랑해 주면 되는 캐릭터이다. 오히려 그런 장치가 그들의 사랑을 더욱 비극적이고 애틋하게 보이게 만드는, 재료만 달라진 로미오와 줄리엣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인종차별의 문제를 살짝 양념을 친.


<멤피스>에선 강력한 흑백 분리 정책으로 이들이 각자 존재하는 이분화된 공간이 이 인종차별의 문제를 관객의 눈앞에 드러낸다. 그리고 휴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그 문화를, 그 공동체를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모두가 바라봤으면 하기 때문에 노력한다. 휴이의 방법대로, 휴이는 다 계획이 있다.  


뮤지컬을 보고 SNS에서 보았던 영상이 떠올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젠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조심스럽다)이 자신들을 표현하는 N word를 사용할 수 있는 유명인들을 가려내는 것이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한 때 힙합 문화를 선도했던 에미넴은 가능한가 아닌가, 링컨은 어떤가 등의 내용이었는데 전자는 의견이 나뉘었지만 후자는 나뉘지 않았다.


생각나는 예가 있어 덧붙인다. 페미니즘 운동에 대하여 배웠을 때 1st wave, 2nd wave 등으로 단계로 나뉘었다. 이들의 방식은 그 상황에 따라 나뉘었는데, 이들이 차별을 당한다는 인식조차  없을 때, 그러한 인식을 갖는 것조차도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아가서 새로운 행동들이 요구되었는데 단순히 말하고 언급하는 단계, 그리고 그 단계에서 넘어서서 행동하는 단계 등이 있다. 모두 다 페미니즘 운동이지만, 행동해야 하는 단계에서 인식만 한다고 해서 그것이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이것에 대해선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때 당시에는 신파적이고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와 함께 인종차별에 대한 감정적 호소가 그 문제를 언급하고 드러내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에도 작동할 것인가, 옛 작품이 과연 현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 고전으로써 그 가치를 온전히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뮤지컬 <멤피스>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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