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야만적 침략>봤다. 영화를 관람하면서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그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영화 제목에서 기인했다. 영화는 두가지의 명사로 이뤄졌다. ‘야만’과 ‘침략’. ‘야만’은 미개하여 문화 수준이 낮은 상태를 이르는 단어이며, ‘침략’은 정당한 이유없이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는 것을 이르는 단어라고한다. 제목에 들어간 단어의 정의를 인지하고 나면, 이 침략을 진행하는 대상과 받는 대상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으로 이내 귀결된다. 더불어, 극중 인물들은 “야만적으로 침략을 받은 것인가? 침략을 한것인가?” 라는 질문도 연결고리 처럼 따라 들어온다. 시놉시스에 나왔다 싶히, 아버지 레미는 젊은 시절 친구들과 미국제국의 몰락을 꾀했었다. 그렇다면 레미와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미국제국이 야만적 침략을 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자신들은 방어했다는 주체와 객체의 설정이 가능한 것일까? 이에 반해 나는 미국의 제국주의’만’이 야만적 침략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극에서는 다른 의미의 침략과 그에 맞는 해결책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의 표면에 드러난 ‘정치적인’야만적 침략 대신에 인물들 겪는 또다른 의미의 그 ‘무엇’의 침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는 아버지 레미의 병환으로 모든 인물들이 모인다. 다만, 그 인물들을 모으는 것은 아버지 레미가 아니다. 그의 아들인 세바스찬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소개한 인물이 아닌, 아들 세바스찬이 아버지 레미에게 소개한 사람은 바로 나탈리다.
아들인 세바스찬을 살펴보자. 자신은 자산의 가치를 교환하는 ‘스왑(swap)’이라는 금융거래를 하는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 레미는 세바스찬의 어린시절에 다른 여자와 만남을 갖고 어머니를 배신했다. 아들은 그런 이유로 아버지 레미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죽음과 마주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이야기 듣고는, 아버지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할 수있는, 어찌보면 미국 제국주의의 산물이라 할수 있는 ‘돈’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막아내려했던 침략의 대표되는 산물을 이용해 아버지를 보호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돈을 이용해 개인 병실을 만들어 주고, 문병인을 만들어 주는 등의 행동을 한다. 아버지를 그 자본의 세계로 초대한 것이다. 그는 자본의 세계를 영위하고 있는것이다. 그의 아내는 어떠한가. 세바스찬의 아내 또한, 물건을 경매에 붙여 돈과 맞바꾸는 경매를 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녀는 낡은 교회에서 그곳의 오래된 물건의 시장 가치를 즉각적으로 판단해버린다. 영화 속에서 세바스찬과 그의 아내는 레미와 그 친구들이 막지 못했던 침략의 대표산물인 ‘자본’을 이용해 그 가치를 교환하는 직업을 가진 것으로 설정됐다. 그러나 그가 그 세계에 잠식된것 처럼 영화는 그려지지 않는다. 잠식의 여부가 그려지지 않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세바스찬은 자본의 가치교환이라는 성질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상태에서 멈춘 것으로 등장하고 극에서 사라진다.
아버지 레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변화를 꾀했으나 실패했다. 교수로써, 아버지로써 말이다. 그렇다면 레미는 아들 세바스찬이 만든 세계를 모른 채, 그 세계에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그는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것을 받아들였단 말인가. 레미는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경제적 이론의 올바름을 따지기 보다는 그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즉면한 문제인, 자신에게 침략해 버린 죽음(살아간다는 것, 노화 등)과 대면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에 포기했던 미제국주의 ‘야만적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순응하며 살았던 것에 반해 이번에 만나게 된 ‘죽음’이라는 침략에 순응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지 중에서 ‘안락사’를 선택하며 지인과 가족들 사이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또 다른 인물인 나탈리를 살펴보자. 그녀는 극속에서 레미의 지인이자, 자신의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한 것으로 설정됐다. 이에 반해 레미와 나탈리는 사이가 좋다. 그리고 나탈리는 마약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레미와 나탈리는 마약으로 서로의 유대감을 쌓았다. 그러나 그녀는 마약으로 죽을 고비를 겪고, 마약으로 유대감을 쌓았던 친구인 레미가 안락사하는 것을 돕는다. 그렇게 그녀는 마약을 끊으려고 노력을 한다. 영화 결말에 이르러 그녀는 레미가 쓰던 집을 물려받는다. 영화속에서는 레미의 딸이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속 레미와의 연대감을 갖는 것은(혹은 부녀의 형태를 지닌것은) 나탈리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것은 혈연관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점은 레미와의 정서적인 유사성을 갖는 유일한 인물이 나탈리라는 것이다. 다만, 아버지 레미는 자신의 의지로 침략을 막아냈으나 나탈리의 대응은 성공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나오지 않는다.
레미와 세바스찬의 자본과 가족을 대하는 상반된 태도를 비춰볼 때, 나탈리가 레미의 집을 물려받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런 순서였을 것이다.
인물들은 각기 죽음, 마약,돈의 세계에서 침략을 받고 있는 것으로 영화는 그려진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저절로 드는 지점이다. 세명의 인물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최초의 질문으로다시 돌아가보자.
‘침략을 하려는 대상은 누구이며, 침략을 받는 대상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이것을 왜 하려는 것이고, 왜 당하는 것인가.’ 이 대답은 영화 <야만적 침략>을 보는 방식을 변경하면 그 대답이 가능할 것 같다. 실제로 영화 또한, 이런 질문에만 천착하는 영화는 아닌듯하다. 이 영화에서 지칭하는 것들을 ‘포괄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인생, 살아간다는 것, 노화, 사랑, 시장의 가치 등은 모든 것이 모든 인간을 침범한다. 그리고 이것에 잘못됨을 알고 있거나 그렇지 않아도, 순응과 대응을 하며 살아간다. 이것을 ‘야만적 침략’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늘상 인간은 나이가 많이 들어도 실수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는 사회화 과정 중이기 때문이며, 원치 않은 세월의 시간을 견뎌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쁜 것과 좋은 것의 장단점을 갖고 있을 것이다.
배울수 있고, 세월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함께 견딜 동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라는 것이다. 이 침략을 이겨내거나 이용하거나 받아들일 ‘의지’말이다.
앞서 영화속에서 레미와 나탈리는 유사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했다. 감독은 왜 ‘나탈리’라는 ‘마약’이라는 중독에 빠지고 아버지의 부재가 있는 세바스찬 또래의 여자를 설정한 것일까에 대해 고민을 했다. 이런 설정을 통해 감독은 관객에게 어떤 의미를 일으키고자 했을까에 대한 것이다. 영화속에서는 세바스찬의 어머니,여동생의 존재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나탈리, 세바스찬, 레미는 새롭게형성된 가족일 수 있겠다. 그들을 묶는 고리는 정서적인 교감 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을 새롭게 가족으로 묶은 이유는 ‘가능성’을 바탕으로 한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밖에 할수 없을 것이다. 마약이라는 벗어나기 힘든 욕구와 자본이라는 ‘제국주의’라고 불릴정도의 거대한 힘앞에서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어도, 다시금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있는 가능성과 희망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