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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15. 2021

영화 <로마> 감상평

밝음과 어둠의 그녀



01.

가끔 영화를 보면 이 영화에 어울리는 색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로마는 회색빛이었다. 빛과 어둠이 동시에 공존하면서도 그 자체로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무채색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태양의 빛을 받으며 이불빨래를 하고 촛불에 의지한 채 스트레칭을 하며 밤하늘의 어둠이 공존한다. 또한, <로마>의 마지막 바닷가 장면과 유사하게 빛과 어둠이 동시에 표현되는 것이 클레오’의 성향과 비슷한 회색과 같은 색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무슨 이유로 감독은 영화를 흑백으로 촬영했을까 질문이 들었다.

<로마>의 최초 감상문에는 ‘영화를 체험했다’고 기재했다. 그러나 다시 본 영화는 그것이 잘못됐음을 알려줬다. 나는 영화를 체험하지 않고 대신, 그녀를 체험했다. 그리고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그녀를 체험한다는 것에 유치하게도 나는 ‘시네마틱’하다는 수식을 붙이고 싶다.


02.

<로마>를 보며 궁금한 지점이 생겼다. 그것은 ‘클레오의 아이는 왜 딸이었던 것일까?’ 라는 것이다. 거칠고 잔인하게 이야기하면, 클레오가 아기를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죽음’의 이미지는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깨진 유리, 박제된 개, 인큐베이터 속 아기 등으로 말이다. 지진이 일어난 후, 보이는 화면은 인큐베이터 위로 떨어진 것은 흙과 돌, 먼지뿐이다. 아기는 보호됐으나, 그것은 흡사 장례식의 모습과 유사하게 보인다. 나는 인큐베이터의 아기를 바라보며 아기의 언니와 할머니로 추정되는 인물이 하던 대화가 인상 깊다. 그녀들의 대화는 클레오의 바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클레오를 지겹게 따라다니던 ‘죽음’의 이미지는 결국 그녀의 아기를 데리고 갔다. 감독의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던 가정부였던 그녀를 위해 만든 영화에서 아이의 죽음까지 겪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클레오는 왜 마지막에 아기를 원치 않았다고 이야기했을까. 남편이 없는 상황과 어머니의 땅이 뺏겨도 가볼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을까.

더불어, 감독은 클레오에게 왜 남자 아이가 아닌 여자 아이를 낳게하고, 자신의 뱃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었을까.

클레오가 아이를 잃고, 자동차를 구매하고 들어오는 아이의 엄마를 만나러 갈 때를 자세히 보면 그 (나만의) 답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인 것처럼 배를 부여잡는다. 그러한 행동은 허전함으로 표현될 수 있으나, 이것은 아이의 부재를 인지함에도 그 부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이다. “죽어있는 것도 괜찮은거 같아”라고 어린 페페에게 말하던 클레오에게 나타난 ‘죽음’을 받아들이는 변화이기도 하며, 배를 조심스레 만지며 걷는 그 행동은 아기의 부재를 유일하게 인정하는 행동 같기도 하다. 클레오는 아이를 원치 않았다고 이야기를 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아기로 인해 벌어지는 변화되는 삶은 클레오에게 거대한 파도 같았고, 그 부재에 대한 상실은 클레오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은 아기에 대한 부채감을 소피아의 아이들에게 갚아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아기의 죽음과 그로 인한 클레오가 겪은 변화에 대한 죄책감과 연민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클레오의 아기를 여자로 선택한 감독의 의도는 정확하게 판단 내리지는 못하겠다. 유추를 해보자면, 클레오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의 삶은 어찌 보면 아기의 존재로 유무로 나뉠 수도 있다. 그런 그녀에게 아기는 주홍글씨와 같은 인장일 수도 있다. 그 주홍글씨는 타인이 새긴 것이 아니라 클레오가 자신에게 새긴 것이다. 그러니, 그 주홍글씨인 아기를 클레오와 동일한 성(性)으로 설정하여 클레오와 분리시켜 죽음을 맞게 한 것으로나마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는 식의 과욕을 부려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리와 죽음을 통해,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 가정부와 영화 속의 클레오에게 조금의 자유를 주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03.

영화를 보며 그녀를 체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의 하강이미지’때문이다. 이것을 누군가는 ‘이미지 레이어링’이라고 했다. 이런 ‘이미지 레이어링’이 주는 효과에 대해서 그 누군가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군가가 설명해 주지 않았던, 물의 하강 이미지를 레이어링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관객인 내가 클레오를 체험케 하는 감독의 진짜 의도였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마>는 사각형 타일에서 시작한다. 그 타일을 청소하며 물을 뿌리고 물이 하수구를 통해 빠져나간다. 이 하강하는 물 위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가 통과하고 그것을 또 물과 거품이 뒤덮으며 주인공 클레오가 등장한다. 그 후 물은 세탁하는 많은 옷에서 떨어지는 이미지로 등장하거나, 설거지하고 더러워진 물이 하수구과 배수관을 통해 하강하는 이미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낙하하거나, 양수가 터져 다리로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로마>의 물의 이미지는 하강하거나 분리되는 이미지다. 그러나 극의 후반에 클레오는 그 물들이 결국 흐르고 흘러, 기어코 모여든 바다의 끝자락인 모래사장에서 밀려오는 거친 파도에 갇힌 아이들을 구해낸다.

간과하고 있었다. 물이 물건과 세제를 갖고 떠내려간 후에 남겨진 것에 대해서 말이다. 오염된 것을 제거하거나, 아기를 보호하지 못하고 터져버린 양수는, 자신의 역할을 하고 사라진다. (그 역할이 완수됐다고 할 수는 없다.) 소피아 집의 개는 여전히 배변활동을 하며 청소를 하게 만들고 있고, 양수는 아기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이불과 그릇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 속의 의장대의 반복되는 등장, 영화를 관람하는 클레오와 페르민, 아이들의 모습, 페르민과 함께 한 그날의 비를 페르민에게서 버림받은 것을 알게 된 날 클레오가 창밖에서 다시금 보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순환’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순환은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과 생애의 굴레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처럼 물의 이미지는 낙하하고 죽음을 초래해도, 흘러서 결국 바다에 닿는다. 그리고 그 바다는 죽음과 삶이 공존한다는 것을 감독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여행의 초반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 클레오를 바다에 들어가게 만드는 요인은 ‘아이들을 살려야한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원치 않았으나 결국에는 아이를 잃어버린 후, 무기력하게 변한 클레오를 감독은 바다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감독은 클레오에게 생과 죽음이라는 삶의 순환에 들어가게끔, 삶, 생명에 대한 의지를 그녀에게 부여하고자한 것은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04.

감독은 참 치사하다. 알폰소 쿠아론은 늘 ‘종말’(죽음)이라는 소재에서 ‘절망’을 거쳐 ‘희망’(삶)을 이야기한다. 이번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존과 다른 점은 거대하고, 멀게 느껴지던 감독의 세계가 일상생활로 시선을 돌렸고, 그것을 공간의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기존과 동일하게 재현했다는 것이다. 일상을 다루는 감독의 시선을 바라보며, 나는 반어적이게도 ‘시네마틱’함을 느꼈다. 시네마틱하다라는 것은 정의되지 않고, 사람마다 다른 정의를 갖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시네마틱한 영화’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느날 그것은 표현주의인 영화가 될 수 있고, 슬로우 시네마가 될 수 도있겠다.

그리고 상영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마음에 흔들리는 것’ 또한 그것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클레오와 감독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고민했다. 심지어 클레오의 주변 인물들은 무책임하거나 클레오에게만큼은 감정을 모두 쏟아내지만, 클레오는 (바다에서의 그 장면을 제외하고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나 우리는 클레오의 감정을 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 <로마>를 보며 나는 그녀를 체험했고, 그 체험은 ‘시네마틱’하다고 표현했다.


*씨네 21 기자인 누군가가 이 별점과 평점을 주는 코너에서 사용했으나, 그것에 대한 후속언급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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