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은 죽는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개체의 끝은 정해져 있고 이것은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너와, 나와, 그리고 시골마을 작은 식당의 길고양이 까칠이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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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6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나는 바로 복학을 하지 않고 한 학기를 더 쉬기로 했다. 처음엔 이 기간 동안 세계 일주를 꿈꿨지만 곧 현실적인 문제로 여행은 잠시 미뤄두고 본가 근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 어떻게 버텼나 싶다. 군대까지 다녀와서 웬만한 고된 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돈 버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주 6일 출근에, 아침 9-10시에 문을 열어 저녁 9시가 넘어야 하루를 마감하니 사실상 개인 시간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친절한 손님도 많았지만, 가끔 술에 취해 함부로 대하거나 힘들게 하는 손님들이 있으면 하루가 지옥 같았다. 전역만 하면 이젠 정말 자유로운 생활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현실은 냉혹했다. 그렇다고 집에서 빈둥대면서 아까운 시간과 돈만 날릴 수는 없었기에,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사실상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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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 어떤 길고양이 한 마리가 가게 앞으로 찾아왔다. 날렵한 눈에 인절미 같은 몸, 무엇보다 머리에 노랗게 자란 5:5 양 갈래 털이 너무나도 귀여운 고양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니 몸에 털을 세우고 하악질을 하는 것이 아니던가, 고 녀석 성깔 하고는, 생각하며 돌아가 다시 일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뒤 숨을 돌리려 다시 자리에 오니 여전히 그것이 가게 멀찍이 앉아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영업을 마무리하고 청소하는 중에 사장님이 고양이 밥을 조금 담아 주었다. 그래도 고 녀석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경계하다 사람이 모두 떠난 뒤에야 조심히 다가와 순식간에 밥을 해치우곤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까칠이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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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이는 원래 가게 사장님이 키우시던 고양이의 새끼였다. 까칠이는 원래 형제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새끼들이 태어난 그때 까칠이는 자기 형제들 여럿을 물어 죽여버렸다. 엄마의 모유를 쟁취하기 위한 맹수의 생존 투쟁이었다고 생각해도, 자연이 아닌 인간의 품속에서 키워지는 동물이었기에 감정적으로 쉽게 용납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말 못 하는 동물, 그것도 새끼 고양이를 재판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장님은 살아남은 새끼 고양이들을 모두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맡아준다는 사람이 많이 나타났지만, 이상하게 까칠이 하나만이 손에 잡히는 것을 극도로 거부했다. 아직 어린 새끼인데도 사람 손을 할퀴며 극렬히 저항하자 결국 사장님도 까칠이의 입양을 포기했다. 그때 이후부터 이놈의 성격을 생각해서 이름이 까칠이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까칠이는 어미와 인간의 품을 떠나 탈출했고, 까칠이의 엄마도 곧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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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가 있는데도 이놈이 몇 년 만에 가게 앞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음식점 특성상 길고양이가 있으면 위생상으로도 좋지 않고 손님들이 싫어할 수도 있기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가족이었으니 반갑기는 한마음도 있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녀석은 근처에 다가오지 않고 저 멀리서 꿇어앉아 한참을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비쩍 곯은 모습이 안타까워 멀찍이 사료를 조금 가져와 주니, 손님이 모두 빠져나가 없을 때 조용히 와서 먹고 가곤 했다. 길고양이 밥 주는 것이 사실 좋은 행동은 아니기에 조용한 시간에 멀찍이, 다른 길고양이가 찾아오면 쫓아내어 버리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때 키우던 반려묘가 찾아왔는데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평소에 동물에 큰 정을 붙이지 않는 나도, 하루, 이틀이 지나도 매일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이놈에게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그렇게 이런 시간이 죽 이어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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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 이상한 점은, 까칠이는 왜 몇 년간이나 집을 떠나 살다가, 굳이 지금 다시 나타난 것일까? 한편으로 의아했지만 나는 그저 먹이가 떨어졌거니 하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의문에 대한 해답은 곧 알 수 있었다.
며칠 사이 까칠이가 유달리 털이 힘을 잃고 더러워져 보였다. 밥 먹는 양도 줄고,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배를 보니 조금 불룩한 것이 분명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대로 계속 함부로 길고양이 밥 주는 짓을 계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사장님과 함께 까칠이를 구조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엔 먹이로 유인해서 손으로 잡을 생각이었는데, 원체 경계심이 심해 근처에 다가갈 수도 없었다. 결국 근처 동물 병원에서 케이지까지 공수해 와서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고생 끝에 데려간 동물 병원에서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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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마을의 1월 1일 일출 모습
낙엽귀근(落葉歸根). 낙엽은 결국 뿌리로 돌아간다. 세상 모든 것은 끝날 때가 되면 그 시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죽음이 다가온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것이 그렇고, 까칠이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온 까닭도 그러했다. 배에 복수가 차올라서 폐를 짓누르고 있고,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앞으로 며칠, 운이 좋아야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갖은 고생을 해서 붙잡은 것이 필요 없었다는 것도 허무했지만, 이 작은 녀석이 얼마나 고생을 했고, 겨우 집에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참 가여웠다.
닷새 정도가 지나자 까칠이의 상태는 이젠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저항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야 사람의 손길을 허용했다. 딱 한 번, 죽음 직전에 쓰다듬어본 그의 살결은 따뜻했다. 결국 까칠이는 그날 저녁을 넘기지 못하고 영영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나는 그날 굳은 사나이 같던 사장님이 우는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온 까칠이, 그리고 그 고향에서, 복수가 폐를 짓누르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은 까칠이의 모습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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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는 살인귀 앙굴리마라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원래 99명의 사람을 죽인 끔찍한 살인마였지만, 100번째 살인 직전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회심하여 제자가 되었다. 붓다의 제자가 된 이후, 하루는 공양을 나갔다가 어떤 산모가 아이를 낳는 도중 해산하지 못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앙굴리마라였기에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났지만, 붓다는 그가 산모를 구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결국 다시 돌아간 앙굴리마라는 산모가 안전하게 해산하는 것을 도와 두 생명을 살리고는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가 있다.
존경받는 스님이 되고, 산모와 아이의 생명까지도 구한 앙굴리마라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전에 지은 죄의 업보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예전 본인의 살인 피해자들에게 돌팔매를 맞아 열반에 들었다는 이야기 또한 전해져 내려온다.
나는 생명을 구한 살인마 앙굴리마라에게서 까칠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까칠이는 생명을 얻어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본인들의 형제들 여럿을 죽여버렸다. 그러고는 결국 그 어미 또한 병을 얻어 간접적으로 세상을 떠나게 했다. 미물에게 도덕을 논할 수야 없지만, 말 못 하는 짐승 또한 인과의 법칙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태어난 이상, 업(業)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까칠이는 그렇게 죽음으로서 생명을 시작했고, 누구에게도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한 채 자유를 갈망하며 살았다.
그러나 치열한 영역 경쟁에서 패배하고 남은 것은 병든 몸뚱이뿐, 결국 까칠이가 돌아올 곳은 본인이 태어나고 떠났던 집 밖에는 없었다. 곧 때가 왔고, 까칠이는 끔찍한 고통 속에 죽음으로서 업보의 대가를 치렀다. 마치 살인마 앙굴리마라가 돌에 맞아 죽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주 잠시의 시간이었지만, 까칠이를 보며 나는 큰 위로를 얻었다. 이런 미물도 자유를 위해서, 매일을 살아가려 노력하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바쁜 일상 속 까칠이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잠시 상념을 잊기도 했다. 그리고 이젠 그 작은 고양이의 죽음에서 무엇인가 큰 울림을 느끼고 있다. 까칠이의 죽음에서 나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존경받는 스님 앙굴리마라가 두 생명을 구한 것처럼, 까칠이 또한 깊은 우울에 빠져 있던 우리의 일상을 잠시나마 구한 것이다.
붓다를 죽이려는 앙굴리마라, 출처-Vipassana Research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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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까칠이가 떠난 지도 많은 시간이 지났고, 아르바이트 또한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 짧은 추억은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군 복무 중인 친한 친구와 만났다. 본인 부대에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낳고는 한 마리를 버리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 아이를 부대원들과 데리고 키우며 동물 병원까지 데려다주었지만, 결국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곤 근처 아름드리 소나무 옆 화단에 묻어주었단다. 비록 이름도 붙이지 않았지만, 힘든 군 생활 중 그들에게 찾아온 작은 생명은 분명 큰 의미였던 것 같다. 비록 그 결말이 비극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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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앙굴리마라를 회심시킬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앙굴리마라여, 나는 여기 이렇게 멈추어 있다. 너는 어리석어 무수한 인간의 생명을 해쳐 왔고 나를 해치려 하지만 나는 여기 이렇게 멈추어 있어도 마음이 평온하다. 너를 가엾이 여겨 여기에 왔다.”
평생을 죽음을 몰고 다니며 끊임없이 달린 앙굴리마라는 깨달은 자에게는 아무리 달려도 다가갈 수 없었고, 그 자리에 멈추어 무릎을 꿇고 나서야 붓다의 손에 닿을 수 있었다.
앙굴리마라가 살인마인 자신이 생명을 구하는 것을 주저할 때, 붓다는 역시 이렇게 말했다.
“앙굴리마라여, 너는 곧 그 집에 가서 여인에게 ‘나는 이 세상에 난 뒤로 아직 산목숨을 죽인 일이 없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편안히 해산할 것입니다.’라고 하여라.”
그리고 마침내 살인귀는 생명을 구하는 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예전의 죄를 무조건 없앨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앙굴리마라 또한 자신의 업보에 돌을 맞아 죽지 않았던가. 다만 끔찍한 죽음으로 얼룩진 삶에도, 누군가에겐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앙굴리마라도, 까칠이도 그랬다. 우리는 결코 인다라망因陀羅網으로 엮인 인과의 법칙에서 도망칠 수 없고, 세상 만물과 수없이 엮인 업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정한 자유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기에 역시 남을 도울 수 있다. 누군가에게 새 생명을 선물할 수 있다. 이 놀랍고도 당연한 사실을 나는 한 작은 미물의 죽음에서 배울 수 있었다. 과거에서 도망칠 수는 없지만, 과거로부터 변화할 수는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