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유명한 시 ‘절정絶頂’에 그려진 눈보라 치는 벼랑 끝은 이미 마음 속에서 그림이 된다.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벼랑 끝에 선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도시 주변의 산에서 이렇듯 고독하면서도 호젓한 풍경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각 지방마다 이름 깨나 알려진 산에서는 주위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설치물이며 휴일이면 넘쳐나는 관광인파로 인해 점잖은 옛 품격은 물론, 잠시 속세를 떠난듯한 적막감마저도 느끼기 어렵다. 이육사의 시에서처럼 ‘눈 감아 생각해 볼’ 만한 그런 곳은 그야말로 교과서에서나 찾을 수 있는 그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품격을 갖춘 당당한 명산이면서도, 아직은 세상 때를 덜 묻힌 그런 산은 없는 것일까? 바로 윗목에 자리 잡은 청량산의 그늘에 가려졌을 뿐, 겨우 세 시간 남짓의 산행에서 상당한 포만감을 주는 산이 바로 안동 깊은 곳에 있는 왕모산(王母山, 648m)이다. 일제강점기의 저항시인 이육사가 ‘절정’을 쓴 곳이다.
원촌, 육사가 나고 자란 명문 세거지
경상도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로 나뉜다. 그리고 경상북도는 다시 북부와 남부로 나뉜다. 안동은 ‘북부 경북’의 중심지다. 낙동강 서쪽에 있어 낙서(洛西) 지역으로 불리는 문경, 점촌, 상주와는 또 다른 문화권이다. 북부 경북이라 하면 낙동강 반변천을 따라 안동, 영양, 봉화의 낮은 언덕을 등지고 기품있게 자리 잡은 고택을 떠올리면 된다. 안동 김, 안동 권, 진성 이, 의성 김, 풍산 류, 예천 권, 풍양 조의 세거지(世居地)가 모두 이곳에 있다.
거대한 안동호가 생겨 내륙을 헤집고 들어가는 길이 멀고도 낯설게 느껴진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안동편에서 유홍준 교수는 “옛길을 호수에 묻어두고 산자락 높은 곳을 휘몰아치듯 돌아가니 ···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길의 정서와 너무나도 다르다”라고 말했다. 안동에는 부석사와 봉정사라는 최고의 불교 문화까지 있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 불린다. 여기에 안동 출신 이육사를 더하면 그야말로 한국 정신문화의 화룡점정일 테다.
이육사는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어났다. 원촌은 퇴계 이황의 후손인 진성이씨 집성촌이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시인 이육사를 배출하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원촌은 강 건너 하계와 함께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마을이다. 하계 출신 의병장 이만도가 유명하다. 1894년 갑오의병이 일어난 곳이 안동이고,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다. 대쪽같은 이육사의 품성은 돌연변이로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원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말을 매던 곳이라고 해서 ‘말맨데’라고 불리던 지명이 어느새 ‘먼먼데’로 바뀌었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원촌’이 됐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서 유독 말이 자주 보인다. ‘백마 탄 초인’도 나오고, ‘코-가사스 평원을 달리는 말굽 소리’도 나온다. 처음으로 발표한 시의 제목도 「말」이었다. 이육사 생가는 1976년 수몰되어 안동시내로 옮겨졌다. 집터에는 청포도 시비가 추모객을 맞고 있다.
어린 육사는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일찌감치 「중용」과 「대학」을 뗏고, 언어적 재능이 뛰어났다. 육사와 같이 한문을 공부했던 동기는 "육사가 사서(四書)를 모두 마쳤다”라고 증언했다. 육사는 1940년에 발표한 <은하수>에서 “옛날 어른들의 엄한 교육에도 천문에 대한 기초지식이라든지 별의 전설 같은 것으로서 정서 방면을 매우 소중히 여기신 것을 생각하면 나의 동년은 너무나 행복스러웠다”라고 밝혔다. 12살이 되던 해 진성이씨 문중학교인 예안 보문의숙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한 행(行)과 연(連) 구성은 선비 집안에서 보낸 유년 시절에 이미 완성됐다.
고려의 임시수도 안동에서 만난 공민왕 신앙
왕모산 산행은 육사의 고향, 원촌에서 시작한다. 산행 들머리인 주차장에서 갈선대까지는 30분이 걸리는데, 얼마 못 가 왕모당이 나온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아담한 목조 건물이다. 당집 안에는 남녀 목신상이 한 쌍 들어있다. 고려 공민왕의 어머니가 이 산으로 피신했다 하여 왕모산(王母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북방에서 내려온 홍건적에 쫓겨 공민왕 가족은 1361년 12월부터 1362년 2월까지 만 70일 동안 왕모산과 청량산 기슭에 숨어 살았다.
왜 하필 안동이었을까. 안동은 고려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고을이었다.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안동에서 대승을 거두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때 안동의 호족과 백성들이 왕건을 적극 도왔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안동을 도호부로 승격. 고려 초 안동 출신 신진사대부들의 정계 진출도 활발해졌다. 이후 고려 왕실과 안동 고을은 오랜 기간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됐다. 공민왕의 외척이 안동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 배경이 됐다.
공민왕 신앙은 안동으로 피난 온 공민왕을 신으로 모시는 공동체 신앙이다. 지역 주민들에겐 왕의 방문이 커다란 충격이자 자랑거리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왕이 지역을 찾아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인데, 전통사회에서 왕은 곧 하늘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비록 그것이 국가적인 전란에 의한 선택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청량산에는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놀라운 것은 공민왕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신앙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다. 청량산과 왕모산 주변의 가송리, 북곡리, 신남리에는 공민왕의 부인과 장녀, 차녀를 신으로 모시는 가계신앙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왕모산 산행 기점인 내살미마을에서는 바로 공민왕의 어머니를 모신다. 주민들은 정월대보름에 이곳에서 제를 올린다. 목신상께 다소곳이 인사하고 시에서 깔끔하게 정비한 탐방로를 따라 10여 분 오르면 드디어 갈선대가 나온다.
갈선대에서 그려보는 육사의 마음
왕모산 산행의 ‘절정’은 갈선대에 올라 장쾌한 낙동강 굽이를 내려다보는 일이다. 이 일은 10분을 지속해도 질리지가 않는다. 첩첩산중에 갑자기 너른 들판이 나타난 탓에 눈이 아파온다. 그래서 육사는 이곳에 서서 ‘눈 감아 생각해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만치 왼쪽으로 이육사박물관이 보인다. 그곳은 육사의 또 다른 역작 ‘광야廣野’의 시상(詩想)지다. 그의 목가적이되 대륙적인 필치의 배경을 이곳 고향땅에서 찾아도 될런가.
육사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사실 그는 한시, 수필, 평론을 가리지 않고 썼다. 수필 「계절(季節)의 오행(五行)」에서 "내 동리 동편에 왕모산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를 모시고 몽진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가 있지만 대개 우리 동리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 뜨는 것이고, 해가 지는 곳은 쌍봉이라는 수정암으로 된 두 봉이 있어서 그 사이로 해가 넘어가는 것"이라고 고향을 이야기한다. 육사는 지금 가고 없지만, 여전히 해는 왕모산 위에서 뜨고 반대편 쌍봉에서 진다.
가까이 시선의 오른쪽으론 띠를 두른 퇴적암이 낙동강에 부딪혀 칼날처럼 서있다. 육사는 하얀 조각돌이 일면으로 깔린 강가에 홀로 앉아, 내일 아침이면 화단에 갖다 놓을 차디찬 괴석들을 주우면서 강물 소리를 들었다. 봄날 새벽에도, 여름 큰물이 내릴 때도 강가에 나가 소리를 들었다. “하늘보다 푸른 물이 심연을 지날 때는 빙빙 맴을 돌고, 여울을 지나자면 소낙비를 모는 소리가 나고, 다시 경사가 낮은 곳을 지날 때는 서늘한 가을로부터 내 옷깃을 날리고, 저 아래로 내려가면서는 큰 바위를 때려 천병만마를 달리는 형세로 자꾸만 가는” 낙동강을 보며 어린 육사는 흰 돛단배에 대한 시상을 키웠으리라.
국어를 공부하는 학자들은 육사의 시에서 고향이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의 고향 원촌은 유년 시절과 성년 시절, 전통사회와 근현대가 뒤섞인 곳이다. 실제로 육사는 일생 동안 중국 대륙을 전전했다. 국내에서도 안동, 대구, 서울 등을 떠돌았다. 갈선대에서 내려다보는 원촌리 풍경은 도무지 청포도가 익어가고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는 마을’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일까. 갈선대에 서면 위대한 시인의 고독한 숨결이 들려온다.
산행길잡이
산행코스는 원천리 내살미에 있는 주차장 원점 회귀코스가 일반적이다. 주차장에서 약 30분 오르면 갈선대가 나오고, 그 사이에 왕모당이 있다. 갈선대까지 가는 길은 야자매트와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쾌적하게 산행할 수 있다. 갈선대에서 왕모산 정상까지는 약 1시간이 걸린다. 중간의 바위지대를 기준으로 각 30분씩 걸리며, 지질 특성상 무 조각 썰어놓은 듯한 판상절리가 많아 바닥을 밟는 맛이 일품이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식생이 바뀌어 소나무 비율이 높아진다.
정상은 널따란 평지라서 백패킹하기에 좋다. 시에서 간벌을 해서 조망이 뛰어나다. 낙동강을 굽어보는 명품 소나무 밑에 평상과 벤치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정상에서 한골입구 삼거리를 거쳐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정상에서 왔던 길을 잠시 되돌아가 천곡지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다. 다만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고 낙엽이 많이 쌓여 있어 미끄럽다. 얼마 못 가 안부에서 임도를 만나면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계곡을 따라 내려온다. 민가부터는 임도를 따라 걷는다. 천곡지를 거쳐 주차장까지 약 30분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