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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의선 Apr 18. 2023

#1. 수고로움과 성가심 사이

[분기간 이의선]

#1. 수고로움과 성가심 사이


[분기간 이의선]




    사랑하는 이와의 미래를 그리는 일은 피상적인 데가 있다. '우리 같이 살자', '우리 평생 함께하자' 등의 이야기에는 각자가 짊어지게 될 삶의 무게는 슬그머니 빠져있을 때가 많다. 장난스러운 모습을 한 채 평생 도란도란 수다나 떨며 늙어가자고 우리는 말한다. 너와 함께하는 매일이 얼마나 좋을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면 얼마나 멋질지 우리는 밤하늘에 별자리를 올려다보듯 읊조린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로의 삶에 침범할 것인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각자의 삶을 포갤 것인지 구태여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일상 속 우리 둘의 모습은 원초적이기 그지없다. 여름이면 속옷 한 장 걸친 모습으로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신다. 찬바람이 부는 계절에는 고양이 털이 덕지덕지 붙은 부드러운 긴소매 옷을 입고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는 집게핀으로 대충 집어 놓고 책을 읽는 내 앞에 긴 손가락으로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는, 머리에 까치집을 단 그가 있다. 어디 하나 꾸미지 않은 그 멀건한 얼굴을 보며 이 사랑을 계속하고 싶다 생각한다.


     집을 거룩한 성(城)이라 여기는 나는 유난스레 집을 가꾼다. 이런 나의 유난스러움을 진즉에 눈치챈 그는 내가 눈치채기 전에 성가신 집안일을 해치워낸다. 수챗구멍에 모인 내 머리카락이라든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적한 액체가 점도 있게 늘어져도 군소리 없이 깔끔하게 치워주는 일 같은 것들. 심지만 남은 두루마리 휴지를 빼고 두툼하고 보송한 새 휴지를 걸어주는 일들 말이다. 고양이 두 마리가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고양이 화장실은 배설물들이 생기기 무섭게 그의 손에 사라진다. 이런 점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를 사랑할 무수한 이유 중 가장 실용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가끔 잊어버린다. 세상에 많은 불편과 수고스러움이 또 내 사랑을 잊게 만든다.


     요전 날 퇴근하며 산부인과에 갔다 왔다. 비뇨기과에서 검진을 받은 그가 이상 소견을 받았기 때문이다. 검진을 받고 보니 나 또한 치료가 필요했고 수일 동안 약을 먹고 검사를 하고 또 약을 먹었다. 꽤나 길게 이어진 치료 과정에 짜증이 마음에 번졌다. 진료를 기다리는 지루함이나 굴욕 의자에 앉는 괴로움보다 여성임에 겪어야 하는 과정들이 원망스러웠다. 기껏해야 그는 소변을 받아 가져가거나 약을 먹는 일만 할 테니까. 피로와 짜증이 겹쳐 이것저것이 불만이었다. 생물학적 구조부터 호르몬의 변화까지 왜 여성들의 고통은 내밀해야만 할까. 남성들에게는 구체적이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것들이 왜 여성들에게만 책임을 물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연이어 받은 검진에서 내 몸속에 혹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크기가 꽤 커서 수술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이 다섯 손가락으로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처럼 답답하고 저릿했다. 취업한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데 수술이라니. 그가 예쁘게 빚어 내 몸에 넣어 놓은 혹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병원을 옮기고 수술 일정을 잡으며 그에게 짜증을 토로했다. 이건 불공평하다며, 한쪽으로만 완전히 치우친 관계성이라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는 내게 그는 묵묵하고 다정한 귀만 내어 주었다. '응응, 정말 그렇지.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어. 미안해. 아프진 않아? 내가 같이 가줄게.' 같은 말을 되뇌는 그였다. 혹시나 자신이 나를 아프게 했을까 연신 미안해하는 그를 나는 혀로 할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썰물 같은 미안함이 몰려왔다. 성(城)을 공유하고 성(性)을 나누는 사이에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나의 성(城)이 무너질지언정 당신은 나와 함께 할 것인지, 신성하고 깨끗한 것만이 온전한 것이 아닌 고치고 나아지고 또 아름다워지길 반복하는 것이 사랑임을 나의 혀로 그를 생채기내고 나서야 깨닫는다. 나는 그에게 무슨 책망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후 보이는 책임들, 결과들, 따라오는 불편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싶었던 걸까.


     아침의 공기에서 봄 냄새가 난다. 차가운 바람 속에 아주 은밀한 따스함이 섞여 있다. 우리 걷던 길가에는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가 주욱 늘어져 있고 한 품 큰 셔츠에 얇은 끈 나시를 받쳐 입은 나는 그의 크고 축축한 손을 잡는다. 아홉 번째의 계절을 맞는 우리는 마치 봄을 처음 겪는 양 감탄하고 한껏 허술해진다. 그 안에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배실 배실 웃으면 그는 아주 소중한 것을 보는 것처럼 찬찬하고 꼼꼼히 내 얼굴을 눈에 담는다. 눈을 감으면 그 얼굴이 달아날까 서둘러 눈을 뜨곤 한다. 우리 함께하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또 매일 나누는 눈빛을 얼마나 따사로울까.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봄이라 그를 떠올리면 따뜻한 늦봄이 생각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만이 불편과 수고스러움을 설렘의 성가심으로 바꿀 수 있다. 내가 이만치 그의 영역에 들어선 만큼 그도 저만치 나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온전히 내 것이었던 시간과 공간이 할애되어 작아지면 그를 탓하게 되리라. 내가 얻은 것은 모르고 말이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키워 나가기로 하자. 내 것이 너의 것으로 포개어지고 너의 조각이 나의 조각으로 바뀌어도 베어 둔 땔감이 많아 조급해지지 않을 만큼.






2022년 봄 냄새를 맡으며,






분기간 이의선

分期間 李宜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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