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코를 만나러 가다
カネオヤサチコ。카네오야 사치코. Kaneoya Sachiko. 그는 그의 이름을 적을 언어가 맴도는 어디에나 있다. 보통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의 동의어다. 하지만 긴네모꼴 거울로, 눈에 들어간 이물감을 찾아 두 손으로 눈꺼풀을 활짝 벌릴 때의 의식하지 못한 기괴함으로 그는 내게 있다. 일간지에 연재되는 추리소설을 탐닉하던 살인마는 작가에게 물었다. 그래서 마지막 화에 저는 어떻게 되나요? 어쩌면 그것은 가벼운 조현병의 증상인지도 모른다. 이창. 누군가 나를 봤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그릴 수 있었을 리 없다. 모든 로드무비는 창조자를 만나러 가거나 그로부터 도망치는 여정. 루소나 괴테가 창작하던 시절 많은 독자들은 그들의 작품 속 캐릭터가 자신을 묘사한 것이라 굳게 믿곤 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작품 속 나의 연인에게, 작가에게 편지를 보냈고 가끔은 답장이 돌아왔다. 예술가가 선택한 적 없는 뮤즈. 내 부모가 나를 빼놓고 내 쌍둥이 형제만을 낳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사치코를 만나러 갔다.
어떤 작품은 의지로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하게 되지만 또 어떤 작품은 기이한 우연으로 인해 떠 안겨진다. 요즘 세대가 치였다고 표현하는 그 상황일 것이다. 내게는 보르헤스나 레닌이 전자에 속했다. 반면 리오넬 메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와 내가 생년월일부터 혈액형, 몸무게, 키까지 모두 같다는 낮은 확률의 일치 때문이었다(물론 수입과 축구 실력에는 넘지 못할 차이가 있다). 일본 출신인 것으로 짐작되는 일러스트레이터 카네오야 사치코를 좋아하게 된 것도 역시 사소한 계기에서였다. 내가 좋아하던 친구가 나를 따라 디비언트 아트(Deviant Art)라는 온라인 예술 커뮤니티에 가입했는데, 마치 내 초상화 같다며 그곳에서 발견한 사치코의 몇몇 그림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솔직히 작품 속 캐릭터와 내가 비슷하다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친구가 보여준 관심이 고마워 증명사진인 것처럼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프로필에 사치코의 캐릭터를 쓰고는 했다. 그림이 워낙 선명하기도 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가면을 오래 쓰면 얼굴과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했던가. 애니 캐릭터를 프로필로 쓰는 남자들은 모두 그 캐릭터에 자신을 이입한다던가. 나도 어느새 사치코의 그림 속 캐릭터가 조금은 내 분신인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 생각하니 어쩐지 나를 그린 화가를 한 번쯤 만나는 게 뮤즈로서 당연한 의무 아닌가 싶어졌다. 혹시 그가 나를 모델로 쓸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아니, 나야말로 작품의 원본인데 그가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그러나 (참 다행히도) 생면부지의 외국인 일러스트레이터를 스토킹 하기엔 내게 돈, 시간, 언어능력, 광기가 부족했고,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음침하고 소심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판매한다는 자그마한 갤러리에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도보 여행객이 세타가야 233을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도큐 세타가야선을 타고 와카바야시 역에 내려 2~3분 남짓한 거리를 동쪽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세타가야선은 지극히 일본스러운 노면 전철로 좁은 주택가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쏘다닌다. 몇 량 되지도 않는 작은 기차 칸에서 내다보는 도시 풍경이 정겨워 추천할 만하다. 세타가야선으로 갈아타는 것이 귀찮다면, 도큐 덴엔토시선을 타고 가다 산겐자야 역에 내려 10분 정도 슬슬 세타가야선 철로를 따라가면 된다. 철로변을 걸으며 지나가는 무지개색 열차의 사진을 찍는 것 역시 많은 이가 한 번쯤 떠올려봤을 여행의 정취다. 나는 식사도 할 겸, 주변 다른 가게도 구경할 겸 역 인근 상점가를 빙 돌아갔기에 정작 그 귀엽다는 전철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
세타가야 233은 건널목을 낀 건물 1층에 위치해 있다. 차양에 그려진 얼굴(ㅇ_ㅇ)이 입가에 작은 웃음을 자아낸다. 워낙 세련된 요즘 가게들과 대조되는 수더분한 외관은 낡은 지방 도시의 어린이집이나 피아노 학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곳의 겸허한 외양에 속아서는 안 된다. 세타가야 233은 예술가와 지역을 연결한다는 목표를 지닌 여러 위탁판매 점포들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축에 속한다. 이는 단순히 판매 중인 작품 수나, 작품을 위탁한 예술가 수, 언론 노출 등 양적 측면만을 근거로 한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예술적 실험 및 지역사회 연계 노력, 홈페이지와 온라인 숍의 깔끔한 관리, 이곳으로부터 커리어를 시작한 훌륭한 창작자들의 존재 등 질적 측면에서 세타가야 233은 눈여겨볼 점이 많다.
세타가야 233은 2002년 12월 처음 문을 열었다. 내부에는 수납장들이 놓여있는데, 수납장의 모든 칸을 합치면 100여 개가 된다. 이 칸을 크기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눠 각각 월 1,000엔에서 2,400엔에 임대해주는데, 의향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수납장을 빌려 자신의 물건을 원하는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 세타가야 233은 임대료 외에 판매 대금의 10%가량을 수수료로 가져간다. 업계에서 어떤 조건으로 계약하는 것이 통상적인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각종 비용에 대해서는 별달리 비평할 말이 없다. 어쨌든 세타가야 233은 판매하는 상품에 어떤 기준 및 조건을 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취지다. 수납장 뒤로는 전시 공간과 전시용 벽이 있고 이 역시 협의 하에 대여해준다.
세타가야 233은 설립 초기부터 크게 세 가지를 기치로 내걸었다. 창작자의 자기표현을 돕는다. 세상의 각종 사안에 대해 얼마든지 세타가야 233의 목소리를 낸다. 창작자와 지역주민, 지역과 국가, 국가와 세계의 네트워킹을 도모한다의 셋이다. 이를 위해 세타가야 233은 사진전을 열고, 디제잉 파티를 개최하고, 평론가가 참석하는 집담회를 모집하고, 판매 작가들의 연합 코미케(코믹 마켓) 참석을 지원하는 등 각종 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땐 혹시 라쿠고(일본 전통 이야기 예술)를 아냐며 지금 라쿠고 나이트를 준비 중이라고 주인장이 자랑스레 이야기했는데, 홈페이지를 뒤져보니 당시 기준 177회째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공연이었다. 아마 세대와 세대를 연결한다는 의미를 크게 보았기에 실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 아니었을까. 그의 기획력과 끈기에 무척이나 놀랐다.
결론을 말하자면 카네오야 사치코 씨(의 신체)는 거기에 없었으며, 그가 판매하는 각종 물품도 이미 매진된 상태였다. 떠듬떠듬 짧은 영어로 사치코의 big fan이라서 여기에 오게 되었다고 하자 주인장은 무척 안타까워하며 시일이 몇 년은 지난 전시회 홍보 포스터를 손에 꼭 쥐어주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얼굴에 실망감이 드러났는지 사탕인가 물인가 입에 넣을 것도 조금 챙겨주었던 기억이 있다. 어떤 환상은 그저 환상으로 남을 때 더욱 아름다운 법 아니겠는가. 덕분에 이런 장소도 알게 되었으니 손해는 없는 셈이라고 위안하며 스티커와 엽서 하나를 따로 구매했다. 다 합쳐서 1,000엔이 못 되었다. 이미 데뷔한 지 10년이 넘은 프로들도 여전히 누군가 자신의 창작물을 사 갔다는 생각에 설레고 뿌듯할까. 세타가야 233은 방문객을 위해 유기농 커피와 차를 200엔이라는 싼 값에 판매하고 무료 와이파이도 제공하고 있었다. 세타가야구에 가게 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들러보는 게 어떨까.
누구나 예술적 소양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찬란한 영감이 된다는 분명한 사실이 너무 자주 망각되곤 한다. 인간 전부가 경쟁의 대상이거나 비교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척박한 사회에서 대체 무엇이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 한국에도 새로 시작하는 창작자들을 지원하고 연결 짓기 위한 공공기관이나 영리·비영리 단체의 시도는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많은 시도들이 정작 연결되어야 할 지식인과 노동자 계급을, 성과 속을, 주류와 하위문화를 서로 잇는 데 성공했는지 자꾸 되묻게 된다. 하다못해 당장 기성 출판계와 소위 '순문학' 작가들, 주류 평론가들이 웹툰이나 장르소설 작가들을 어떻게 대했나. 일부 잠재력을 보여줬던 사례들은 또 얼마나 빨리 젠트리피케이션의 물결에 휩쓸려갔나.
세타가야 233에 전시된 작품들 중 일부는 분명 지나치게 자의식과 감정이 넘치고 표현 기법도 조야하다. 그러나 갓 첫 단편의 퇴고를 끝낸 소설 작가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프로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 같이 놓여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이색적이고 경쾌한가. 어느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말마따나 그렇게 '잘못' 친 음표들이 비로소 블루에 색을 더해주어 다채로운 회화를 그려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예찬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추어리즘이 아니라 열려있는 네트워크다. 네트워크는 더 나은 것과 덜 나은 것을 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 예술로 예술을 만든다. 뮤즈라는 착각 속에 떠났던 내가 이 짧은 에세이를 생산하는 창작자가 되었듯이 말이다. 네트워크의 힘은, 세타가야 233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세타가야 233(世田谷233)
휴일 제외 12:00~20:00
매주 화요일, 제1·3주 수요일 휴무
홈페이지 : http://233.jp/index.html
트위터 : https://twitter.com/setagaya233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tokyo.233
위치 : 1-chōme-11-10 Wakabayashi, Setagaya City, Tokyo 154-0023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