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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뻬릴 Jan 03. 2023

[일본 문구점] 도쿄 코엔지역 - 데이즈

막연 속 우연과 인연이 교차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작 "1Q84"의 배경이기도 한 도쿄 스기나미구 코엔지(고엔지, 高円寺) 주변은 교토 대학이나 시모키타자와 등과 함께 일본에서 손꼽는 진보적 청년문화의 본거지다. 계몽주의의 전파에 카페와 살롱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구체화되는데 명동과 대학로의 학사주점들이 나름의 역할을 했듯, 일본의 1960~70년대 학생운동 역시 코엔지에 자리 잡았던 재즈카페, 락카페들 없이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으리라. LP판이 가득 꽂힌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한창 음악으로 시끄러운 와중에 소리를 질러가며 의견을 나누는 젊은 동지들의 얼굴을 떠올리자면, 깨달음을 구하려 서로를 거침없이 꾸짖는 일본 승려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는 한다. 말 그대로 스스로를 잊는 고요함禪 속에서 찾는 것이 한국인의 깨달음이라면, 스스로를 쟁투의 한가운데 내던져 깨질 듯 겨우 건져냄이 일본인의 선인 것인가. 

밴드 활동과 사회운동이라는 문화적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코엔지 인근은 여전히 펑크를 비롯한 각종 음악 공연이 펼쳐지는 라이브 하우스들로 유명한 동시에, 2010년대 들어 마츠모토 하지메(松本哉) 씨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빈민운동을 재점화하는 지리적 배경이 되었다. 이렇게 개성적인 분위기와 함께 도쿄의 여러 대학과 적당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조건이 맞물려 이곳은 일본에서도 유난히 인구 중 20~30대 청년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이는 다시 각종 구제 의류 가게를 비롯한 독특한 점포들이 이 동네에 자리 잡는 결과로 이어졌고, 오늘날 코엔지는 조금은 다른 일본의 풍경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발걸음을 옮길만한 곳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저기 강의를 다니면서 느낀 점이기도 한데, 역시 어떤 지역을 매력 있게 만드는 가장 희소하고 또 중요한 자원은 청년, 그중에서도 자유롭고 이상을 지닌 청년이 아닌가 싶다. 비록 요사이 한국에서 '진보 대학생'이라는 용어는 아낌보다는 배척과 놀림의 대상이 되었지만 말이다.


삭막하고 엄격하지만 파란 타일 같은 약간의 낭만도 있다(6th Feb. 2020)


도쿄 도심에서 츄오선을 따라 신주쿠-오쿠보-히가시나카노-나카노역을 지나면 코엔지역에 도착한다. 자그마하지만 점장의 취향과 개성이 짙게 묻어있는 문구류 편집숍 데이즈(Days)에 가려면, 도시의 불빛이 번쩍이는 대로변이 아닌 역 남쪽 출구의 골목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상권에 따라 역 근처에는 각종 술집과 야키토리집이 먼저 나타나고 뒤이어 세탁소니 작은 식당들이 모습을 보인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아기자기한 잡화점들과 문구점들, 책방들, 구제 옷가게들이 보이는데 데이즈는 그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 가게들이 소위 말하는 레트로풍이거나 보헤미안 분위기를 띠는 데 반해, 데이즈는 홀로 도회적인 인상을 물씬 풍기고 있어 묘하게 이질적인 불협화음을 낸다. 그저 지나가던 관광객이라면 들어갈지 망설여지는 냉정한 분위기. 게다가 구글 지도에 달린 물건을 사지 않으면 점장이 폭언을 한다는 댓글까지. 그다지 쉬운 장소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에 갈 때마다 굳이 데이즈를 들르게 되는 것은 어디선가 한 번쯤 그게 힙(hip)하고 좋다고 들은, 그런데 한국과 일본을 샅샅이 뒤져도 도저히 찾지 못했던 물건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되기 때문이다. 각종 볼펜과 만년핀들, 엽서와 잣대들을 거쳐 저금통이나 성냥, 가방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대중없이 진열된 문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면 여지없이 "이거 그건데!"하고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만다. 일본의 문구점들을 훑고 다닌 끝에 결국 거기가 거기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오래된 깨달음을 재확인하려는 찰나, 데이즈만큼은 늘 무언가 조금 다른 것을 하나쯤 몰래 숨겨놓는다. 애초에 크지도 않은 문구점이라 구체적인 기대나 목표도 없이 막연히 찾아갔다가, 우연한 기회로 평생 손에 익을 필기구를 만나는 반가운 인연을 맞닥뜨릴 수 있는 곳이다. 


자주 써서 다 해진 체코제 군용 파우치와 올드 히커리 2색 목수 연필, 발로그라프 Epoca P 볼펜(3rd Jan. 2023)


데이즈는 호불호가 갈릴 만한 가게이고 그것은 데이즈의 마스터가 타협 없이 자신의 고집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많은 점포가 그러하기는 하나 이곳은 들어서서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눈다거나, 여러 문구류를 하나씩 손에 들어본다든가 하는 등의 민폐와 편의 사이에 놓인 행동들에 조금 까다로운 편이다. 그래서 은연 중 긴장하게 되는 까닭일까? 세계 각지에서 모아 온 데이즈의 컬렉션을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시장의 왕인 손님으로서의 의기양양함보다는, 안목을 시험받는 학생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하지만 그런 깐깐함과 섬세함 덕에 이곳은 취향이 맞는 누군가에게는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기쁨과 놀라움을 선사한다. 여러 작은 점포들이 문을 닫는 와중에도 15년이나 유지된 데이즈의 역사는, 문구와 사람 사이 작은 기연奇緣들을 엮어내는 점장의 솜씨가 결코 만만치 않은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2019년의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쳐 약 4년여 만에 다시 일본여행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 수년간 한국인이, 더 나아가 인류가 공유한 팬데믹과 기후변화, 경제위기의 경험은 중산층이 자유롭게 세계여행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당연한 것이거나 정의로운 것이 아닐뿐더러, 심지어는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깨우쳐주었다. 낙천적으로 또 조금은 무책임하게 말하자면, 그러니 갈 수 있을 때 즐기시라. 어쩌면 우리의 후손은 다른 나라에 가보는 것이 일생의 꿈인 시대에 살아갈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기쁨은 기쁨대로 누리되, 우리가 던져진 세계는 세계대로 외면하지 않는 용기가 그나마 진실된 태도일 테다.



데이즈(Days)

13:00~20:00

화·수요일 휴무

홈페이지 : http://www.days-st.com/

위치 : 3 Chome-56-5 Koenjiminami, Suginami City, Tokyo 166-0003 일본




코엔지역 맛집


카레토코로뉴체크(カレー処 ニューチェック)

수·목요일 휴무

평일 17:00~23:00; 주말 12:00~15:00 / 18:00~23:00

가성비가 좋은 수프카레집. 맵기를 조절 가능

위치 : 일본 〒166-0003 Tokyo, Suginami City, Koenjiminami, 3 Chome−59−11 五麟館ビル 1F


아게몬야(あげもんや)

월·목요일 휴무

11:30~15:30(LO15:00) / 17:30~21:00

가성비가 좋은 튀김집. 돈가스와 가라아게 정식이 유명
위치 : 일본 〒166-0003 Tokyo, Suginami City, Koenjiminami, 4 Chome−29−9 シャルマンハイ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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