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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님 Jun 15. 2024

흔적(5)

박사골마을의 꿈

1998년도 MBC 다큐로 소개되었던 곳,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던 곳, 고향 마을을 들렀다. 면 단위에서 박사 배출을 가장 많이 한 곳으로 박사골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어린 시절의 많은 추억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5, 6세 정도였을까? 이곳으로 이사 오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도로에서 내려 마을을 가려면 냇물을 건너야 했다. 큰 바위 징검다리가 있었다. 차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징검다리는 매끄럽게 닳아 빛이 반사되었다. 냇가 가장자리에 비석처럼 우뚝 서 있는 큰 바위 밑을 물이 휘몰아 흘러갔다. 푸른빛이 도는 깊은 물에 오색찬란한 물고기가 놀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피리였다. 일부 가족들은 이사 갈 집에 먼저 가 있었던 같다. 마중하러 오는 둘째 언니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성, 성 우리 이사 간다, 이사 가"  



         

이미 매매한 옛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 밖에서만 둘러보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친척이 대부분이었던 마을에 사람도 바뀌어 아는 사람이 없고, 마을의 모습도 변하여 낯설다. 가슴 한편이 빈듯하다. 세월이 흘렀음을 누군가 짚어주지 않아도 공기로, 느낌으로 와 닿는다. 성동저수지로 올라갔다. 참 많이도 힘들었으나 산세의 아름다움이 위로가 되었던 곳이다. 저수지를 둘러싼 산과 숲, 푸른 하늘이 한 폭의 수채화다.       

저수지 저 건너편 산에서 땔 나무를 했다. 솔가리를 갈퀴로 긁어 가리나무 동를 만드는데 “부~엉”하는 부엉이 소리가 들렸다. 순간, 마음이 급해지고 숨이 가빠졌다. 솔가리을 모으는 재미에 빠져 날이 저무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산속의 어둠은 구름이 달을 가리듯 빨리 찾아오는 법이다. 무서움에 모아놓은 가리나무를 남겨두고 숲길을 빠져 나왔었다.

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올라가면 다랭이 논이 있다. 모내기를 끝내고, 일이 다 끝났다고 삿갓을 집어 드니 그 밑에 또 한 다랭이가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삿갓으로 덮일 만큼 작은 논들이 올망졸망 곡선을 이루며 계단처럼 붙어 있다. 빗물에 의지해 농사를 짓던 천수답이다. 물이 없으니 가뭄에 강한 벼를 심었다. 산두벼라는 밭에 심는 벼다. 알이 굵고 잘 여무나 수확량은 일반 벼보다 적었다. 지금은 다랭이 논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즐긴다. 남해 어느 마을은 문화관광지로 지정되어 경제적 수익을 주지만, 먹고살기 위한 농지로만 생각하면 죽을 맛인 땅이 다랭이 논이다. 지금은 누가 그리 악착같이 농사를 짓겠는가. 그곳이 논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게 풀과 나무로 우거져 비탈진 산이 되어 있다. 감나무도 많았다. 감은 따기도 힘들었지만 운반이 더 큰 문제였다. 자루에 담아 머리에 이면 둥글둥글한 것이 처져 내리고, 무겁고, 감꼭지가 머리를 찔렀다. 모든 농사의 수확물 운반이 그랬다. 머리로 이고, 손에 들고 날라야 했다. 짐을 꾸려, 높은 곳에 올려놓고 머리에 인 다음, 쉬지 않고 집까지 와야 했다. 쉬면 다시 일어설 힘이 없어졌다. 집에 와서 토방에 짐을 부리면 무게에 눌렸던 머리가 시원~ 해지며 목이 쑥 올라오고,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졌다.  

그 당시에는 왜 우리 논과 밭이 모두 멀리 있어 운반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아버지께서 퇴직과 사업실패로 궁핍하던 중에 교직에 복직을 하시고 한 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 터를 잡으셨다. 종중 땅 농사도 지으시며 살림을 일구다 보니 멀리 있는 값싼 땅들을 사신 것이었다. 위 형제들은 고생을 하였으나 나는 눈치가 없었는지 어려움을 못 느끼고 자랐다. 아버지께서 출근하시고 일할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친구들 중에도 나만큼 농사일을 한 사람은 없을 듯하다.

어느 친구가 말했다.

“선생 딸이라 곱게 자란 줄 알았어 야.”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우마차 만큼이나 큰 리어카가 생겼다. 리어카를 끌고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는 밀어붙이는 리어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리어카가 나를 통과하여 아래로 내리쏠 것만 같았다. 리어카를 뒤로 젖혀 브레이크를 바닥에 끌며 내려오니 이제는 내 몸이 리어카의 손잡이에 매달린다. 허나, 이것도 요령이 생겼다. 손잡이를 적당히 내리누르며 앞과 뒤의 무게중심을 잡고 내려오니 안정감이 생겼다. 리어카를 이용하니 훨씬 편해졌다. 어머니께서도 무거운 짐을 나르는 딸을 조금은 덜 안쓰러워하시게 되었다. 우악스러운 청춘이어서 가능했던 농사일들이었다.           

이 청춘에 서울구경이라도 해보고 싶던 차에 서울의 한 우체국 저금계 계약직으로 취업을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저축을 장려하던 때여서 초등학교로 저금을 걷으러 갔다. 계장이하 3명이 출장을 가면 학생들이 통장과 돈을 들고 차례를 기다렸다.

월급날, 계약직이라고 다른 곳에 가서 월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민망한 표정으로 딴청을 부리는 동료들 보기가 미안했다.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1년여 근무 중에 아버지께서 집으로 불러 내리셨다.    




특수학교 교사 자격시험 공고가 있었다. 교육대학교에 낙방하고 실의에 찬 딸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려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공부할 교육학 교재 준비와 학습지도안 쓰는 법 등을 가르쳐 주셨다. 가고 싶은 길을 갈 수 있는 기회였다. 공부가 재미있었다. 자격시험을 보러 갔다. 면접시험에서 면접관이 질문했다.

 "특수학교 교사가 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을의 장애아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집에 있는 것이 안타깝다. 가르치고 싶다고 답했다.

특수학교교사 자격을 받고 인천의 한 사립학교에 임용되었다.

그렇게 상경하던 날, 마을 한 어르신이 그러셨다.

“리아까를 두고 어떻게 간디야!”   


그러나 그 교육자의 길은 리어카를 끄는 정도의 시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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