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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Jul 11. 2021

후리한 어른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에어팟을 끼고 생각의 여름을 들으며 슬렁슬렁 걷다가 역 안에 있는 스마트 도서관에서 책 두 권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여름이구나, 라는 행복감과 동시에 서울 도심에서 후리한 차림으로 좋은 음악, 좋은 책을 누리는 게 당연한 스스로의 모습에 “나 너무 어른이네!” 싶어 졌다. 내가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은 포멀한 복장으로 격식있는 자리에 갔을 때보다는 이렇게 ‘익숙하다 못해 후리할’ 때이다.

 

 중학생 때 미샤와 같은 로드샵 브랜드가 처음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시내에 나가면 미샤 매장이 있었는데, 틴트나 메이크업 베이스 같은 화장품을 사고 싶어 들어가고 싶어도 매장 직원이 교복 입은 중학생인 나를 무시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근처만 서성이다가 들어오곤 했다. 초등학교를 네 군데를 다녔고, 좋지 않은 기억들이 있어서인지 새로운 장소에 가는 게 늘 두려웠다. 학원을 등록하고 첫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에게 학원이 이상해서 다니기 싫다고 말하기 일쑤였다. 사실은 두려웠다. 애들이 나를 싫어할까 봐, 사랑받지 못할까 봐. 고등학생 때도 나는 늘 화장을 하고 다녔다. 여드름이 있는 피부 그대로 다니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조금이나마 꾸미고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느껴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들이 많았다.


  대학생이 된 어느 날 화장품을 교환할 일이 있어서 백화점을 들르게 되었다. 화장품을 교환하고 백화점 거울을 통해 츄리닝 차림으로 선크림만 바른 채 서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놀랐다. 백화점에 가기 위해서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잊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 순간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감동했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에는 부장님이 시켜서 중요한 위원회의 심사위원을 하고 왔다. 그곳에는 경력이 많아 보이는 중년의 어른들이 가득했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곳에 심사위원으로 올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위축되었다. 끝나고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명함을 몇 개 챙겨가지 못해서 다 나눠주지 못했다. 그런 모든 어설픔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다음 날 부장님이 어땠냐고 물으셔서 그대로 말했더니 크게 웃으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여자 의사들이 자기를 낮춰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근데 지식으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위축될 필요가 전혀 없어. 스스로 충분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능숙한 척 연기라도 해, 하다 보면 진짜로 능숙해질 거야.” 내가 보기엔 누구보다 능숙하고 당당해 보이는 부장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신 시절이 있었다. 능숙한 척 연기를 하다 보니 실제로 능숙해진 거구나. 자격은 이미 나에게 있었다, 연습이 필요할 뿐. 가슴속에 새로운 문이 생겨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앞으론 나도   동작으로 능숙한  웃고 말하고 명함을 주고받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런 모습들이 나의 일부가 되고 백화점 거울에 비친 후리한 나를 발견했을 때처럼 어느 순간  이상 스스로에게 자격을 묻지 않는다는  깨닫게 되겠지. 그런 날이 온다면 집에 돌아와 “  정말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 하고 외치며 맥주를 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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