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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망스 Sep 29. 2024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2)

숙취로 출근 안한 직원 대타를 뛰다가

오늘도 여느 때처럼 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팀장님이었다. 전화를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나를 다급히 찾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소리씨, 오늘 사무실로 오지 말고 카타르 연수생들 호텔로 픽업 갔다가 교육 운영까지 좀 해줄래요?"


어? 요즘 카타르 공무원들 대상으로 초청연수를 진행하고 있는 건 알고있지만 분명 현지씨가 담당하고 있는데. 담당자가 따로 있는데 왜 나를 찾지? 의아한 나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팀장님은 금방 말을 이었다.


"현지씨가 아프다고 못 나온대요. 얼른 좀 대신 가줘요."


그렇게 나는 급작스러운 팀장님의 전화를 받고 종로의 한 호텔에서 카타르 연수생들을 픽업한 뒤 교육장으로 이동했다. 교육장에는 현지씨와 같이 초청연수 업무를 담당하는 소은씨가 있었다.


"오늘 현지 주임님 못 나온다고 팀장님이 저보고 대신 교육운영 하라고 하시네요."

"응 들었어. 나도 알아. 하.."


탐탁지 않아 하는 소은씨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고 보니 소은 씨는 현지 씨가 술을 마시고 회사를 안 나오는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지씨는 과음을 한 날이면 다음날 갑작스레 연차를 쓰거나 연락이 잘되지 않곤 했다. 무단결근 이력도 있었다. 그래도 소은씨는 현지씨가 아프다고 말했다 하니 의심스러움을 겉으로 티 내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그가 술 마셔서 출근 못했다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듯했다.


그로부터 약 세 시간 뒤, 현지씨가 늦게나마 교육장에 도착했다. 나만큼은 현지씨가 숙취가 아닌 아파서 출근못했을 거라는 걸 믿어주고 싶었지만, 이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소은씨도 눈치챘는지, 이내 표정이 굳었고 현지씨를 쌀쌀맞은 태도로 임했다. 현지씨 또한 절대 굽히지 않았기에, 교육장에는 살벌한 기싸움의 기운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둘의 기싸움 사이에 끼어있는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나는 도대체 무슨 죄람..


현지씨는 팀장님이 전날까지 시켰던 강의자료 번역 업무를 마무리하지 못했는지,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이동해서 급하게 번역 업무를 시작했다. 한 시간 뒤에 교육 시작일 텐데. 이 많은 양을 언제 다하려고 그러지. 다급한 그의 타자놀림에 나까지 마음이 급해졌다. 옆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에 놀라 뒤를 보니, 팀장님이었다. 본인이 정해준 데드라인을 넘겨서 급히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부하직원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해장해야죠?"


헉. 정말 헉이었다. 저 말은 소은씨가 아파서가 아니라 숙취로 출근을 늦게 한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건데. 팀장님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로, 쌀쌀맞게 내뱉은 한 마디에 놀란 나는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리며 흘깃 현지씨를 쳐다봤다. 사실을 들킨 당황스러움과 불쾌함에 현지씨의 몸이 굳었다. 급하게 타자를 치던 그의 손가락도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리며 팀장님을 쳐다봤다. 여전히 무표정으로 쌀쌀맞게 현지씨를 쳐다보고 계셨다. '아.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게 이런 건가. 토 나올 정도로 숨 막혀···.' 정말이지, 정적이 흐르는 차가운 공기를 뚫고 너무나 집에 가고 싶던 순간이었다.


몇 년이 흘러 술자리에서 회포를 풀 때 알게 된 사실인데, 팀장님은 현지씨가 술 마셔서 회사에 못 나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다. 사건 발생일 전날 밤, 현지씨가 팀장님께 전화를 잘못 걸었고 술집에서 떠들던 소리를 팀장님이 모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팀장님은 아프다고 거짓말한 현지씨가 너무나 괘씸했을 터였다.


그런 팀장님과 현지씨 그리고 소은씨 사이에서 나 또한 눈치를 보며 상황을 개선 시키느라 꽤나 애를 먹었었다. 현지씨 일을 대신 하는 건 열 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도 나와 관련 없는 일로 직원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건 솔직히 좀 힘들었다.


그런데 웬걸,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이라 했던가. 갑작스럽게 현지씨 대신 카타르 초청연수를 맡게 되면서 내가 외국어를 잘 한다는 것이 회사에 삽시간에 소문이 났다. 일전에 와플집에서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어로 대화하며 나의 외국어 역량에 대해 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소문이 사실로 굳혀지는 데에 일조한 것이다.


그렇게 숙취로 출근 안 한 직원의 대타를 뛰던 나는, 얼마 안 가 해외사업팀으로 발령 나게 되었다. 국제 업무를 맡고 싶었던 내게 해외사업팀으로의 발령은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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