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문고에서 엄마를 저격하다
“엄마, 저와 나성이를 비교하지 마세요. 저는 저고, 나성이는 나성이에요!”
학급문고에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을 넣을 건데 각자 빈칸을 채워보라는 선생님 말씀에 나는 당당하게도 저렇게 썼다. 엄마는 전교 1등인데다 학생회장이고 선행상까지 받은 내 절친한 친구와 나를 자주 비교했는데 나는 그게 항상 서운했다. ‘내가 어때서? 나는 나대로 괜찮은데 엄마는 왜 매번 이렇게 비교를 하는거야! 내가 딸이잖아!’ 학급문고가 책자로 만들어지고 난 뒤 다른 아이들의 글을 보니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부모님에 대한 감사 일색이었다. “부모님 사랑해요,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나만 은혜도 모르고 엄마를 미워하는 아이 같았다. 게다가 좋은 방식도 아니고 친한 친구 이름을 엄마를 저격하는 글에 저런식으로 드러내다니,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학급문고는 여러 사람에게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나만 그 후폭풍을 생각지 못한 것일 뿐, 중요한 건 일기였다. 중학교 때 허술하게 잠가 놓은 일기장에는 늘 초대하지 않은 독자가 숨어 있었다. 아빠는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집에서 자주 소리를 지르고 밥상을 뒤엎었다. 아침과 저녁 반찬이 똑같다는 게 이유였다. 도대체 어른이 왜 저러는지 초등학생인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늘 아빠의 감정이 오늘은 어떤지 살펴야 했고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그런 아빠가 죽도록 미웠는데 ‘아빠가 없으면 우리 집이 더 행복할 것 같다. 엄마, 오빠, 나 이렇게 셋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쓴 일기를 본 아빠는 엄마에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고는 며칠을 힘들어 했다고 한다. 나중에 엄마를 통해 들은 이야기다.
누가 볼 거라 생각하지 않고 글을 썼던 나는 글이 공개되고 나서 당혹스러웠다. 글은 솔직하게 쓰면 안 되는구나 싶어 그 이후로 잘 쓰지 않았고 쓰더라도 내 생각이나 감정은 쏙 뺀 그럴듯한 이야기들만 썼다. 내 글을 보고 누가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일기장에는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적히지 않은 채 빈 여백만이 가득 남았다.
남이 읽기를 바라지 않는 숨기는 글쓰기를 하다 이제는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글을 쓴다. 내 감정이 어떤지 표현하지 않아도 괜찮은 줄 알았다. 감정따위 잘 숨기는 나니까, 난 그런데 능숙하니까. 내 이야기로 누군가 상처받는 것보다 숨기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숨겨 놓은 감정은 독이 되었다. 억지로 꾹꾹 눌러 놓았던 감정이 나를 집어삼켜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는 웃지 않고, 먹지 않고, 잠들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표현을 잃은 나는 호기심과 욕망도 함께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내 생각과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적어 내려가 보기로 했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고칠 수 없지만 글은 수정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솔직한 글은 아직도 무서워서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소실점으로 밀어 넣기를 반복하게 된다. 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이 아닌 나에게로 다가오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까? 남이 상처받고 내가 후회하더라도 직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