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와 씨름하는 새로운 세계
마음이 갑갑하고 답답해서 폭발할 것 같았다. 어디에든 게워내 속을 비워야 했다. 나는 누구인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 마음 상태는 어떤지 보이지 않는 날들이 몇 달이고 이어졌다. 그러다 생각난 게 글쓰기다. SNS에 간혹 생각나는 것들을 끄적이긴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해본 적이 없는 데다 어떻게 쓰는 건지 배운 적도 없어서 일단은 수업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부터 봐둔 집 근처 독립서점에서 매주 글쓰기를 하고 있어 부리나케 수강신청을 했다. 사실 이곳은 이사하기 전의 집에서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수업을 들어야지 하면서도 주말이 되면 피곤했고 쉬기 바빠 등록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다 이사를 하고 나서야 마침내 이곳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가까이 있을 땐 언제든지 갈 수 있을 줄 알고 우선순위에서 지워버렸는데 멀어지고 나서야 주섬주섬 찾아오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글쓰기 수업을 듣고 싶다 생각한 후로부터 몇 년이 지났지만 책방은 아직 있었고 수업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비 오는 토요일,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약간 당황했다. 내심 글쓰기 수업을 듣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일 거라 생각했는데 나를 제외한 두 명이 남성이었다. 이 또한 편견이다. 글에는 성별이 없다.
두 시간 수업이 어렵지 않아서 잘 따라갈 수 있었다. 강의를 듣고 짧은 글을 쓰고 낭독하는 방식이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내 글을 공유한다는 것이 낯설기도 편안하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사이이다 보니 낯설었고 그 때문에 편견이나 기대가 없어서 편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글을 쓴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같은 단어를 두고 해석이 제각각이어서 글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무릎을 치기도 했다. 쓰는 방식도 달라 나는 에세이, 한 사람은 소설, 다른 이는 시적으로 글을 풀었다.
인천공항에서 24시간 비행기를 타고 내리면 지나다니는 사람도, 음식 냄새도 생소한 태평양 건너 남아메리카에 도착하게 된다. 방금 전에 딛고 있던 시공간이 하루 만에 뒤바뀌어 눈앞에 나타난다. 막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처럼 책방 문을 열면서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에 진입했다. 글을 썼다 지웠다, 생각하고 읽기를 반복하며 활자와 씨름을 하는 사람들의 나라. 춤을 추기도, 골방에 갇혀 괴로워하기도 깊은 울림에 눈물짓기도 하는 놀라운 세계. 오랫동안 관심을 두고 있었으나 남의 이야기였던, 사는 게 바빠 우선순위에서 미뤄두었던 글쓰기를 이제 시작하려 한다.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하고 싶은 여러 가지 말들을 한 갈래로 정리하고 잘 다듬어 낼 수 있기를, 나의 글이 의도한 모양대로 상대에게 가 닿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