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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나무 Jan 09. 2022

황순원 장편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




소설가 중의 소설가 황순원


교과서에 수록된 단편소설 <소나기>로 인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름 석자는 들어봤을 소설가 황순원. 그는 순수문학 작품을 쓰는 것 외에는 일절 글을 써서 기고하거나 인터뷰에 응하는 일이 없다시피하던 그야말로 소설가 중의 소설가였다. '소설가는 소설로 말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문단에서도 본보기가 되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소설가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이유는 그가 철저한 리얼리스트이면서 동시에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이상적이다.


<사상계>에 연재되었던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황순원이 가장 왕성한 열정과 정력으로 작품활동을 하던 40대때 집필한 대표작으로,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과 휴전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황순원 소설의 특징 중 하나로 '리얼리즘'이 꼽히는 이유를 역시 이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까지 그의 장편을 주욱 읽어보면 한국의 근현대사를 민중의 눈높이에서 습득하게 된다고도 할 수 있는데, 나는 그런 면에서 황순원의 소설들이 문학적인 가치에 더해 역사학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전작인 <카인의 후예>가 해방 직후 이북의 농촌을 배경으로 공산주의의 침습과 그로인한 인물들의 갈등과 사랑, 절망과 희망을 그리고 있다면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한국전쟁 즈음의 역사를,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신들의 주사위>는 전후 개발이 급속도로 진행되던 70년대 한 시골 마을의 변화와 자본주의의 침습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그려냈던 바 있다.






전쟁이라는 현실에 던져진 피해자들의 이야기


'이 동란에 나왔던 젊은이들은 죄다 피해자밖에 될 수 없다'라는 동호의 말처럼,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6.25 전쟁의 한가운데 그저 태어난 죄밖에 없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결한 꿈을 끝까지 간직하고만 싶었던 동호와 숙이,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고 주체적인 사고과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현태, 현실적이고 성실하지만 남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윤구, 잔혹한 세상으로 인해 더이상 신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선우상사, 영 제멋대로인 기분파 미란 등 갖가지 성격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그 누구도 피해자로서의 운명을 피해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피해자밖에는 될 수 없는 인간의 인생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치고 '전쟁같은 인생'에서 면제된 사람이 어디있을까. 내 잘못이 아닌 일의 나비효과로 크나큰 상처를 입어버린 ‘피해자’ 아닌 사람이 어디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연인의, 친구의, 가족의, 지인의 언동에 말려들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누군가의 별 뜻없이, 혹은 단순히 재미를 위해, 혹은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가져오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게다가 세상엔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본체만체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에게 의도적으로 손해를 끼치고 배신을 일삼는 악의적인 인물들도 늘 부족함없이 존재해왔다.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에 던져지듯 태어난 우리가 ‘피해자’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숙이는 결혼때까지 순결을 지키고 싶은 순수한 마음을 동호에게 전하고, 동호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지켜주기로 한다. 그렇게 순결을 간직해온 두 사람을 전쟁이 갈라놓고, 동호는 전쟁터에서 만난 현태라는 친구의 장난기어린 내기로 인해 술집 여자에게 동정을 잃어버리고 만다. 성적인 면에 있어서만은 영 쑥맥이던 동호는 첫 섹스를 숙이 아닌 다른 여자와 해버렸다는 죄책감과 첫경험 상대인 술집여자 옥주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끌림 사이에서 영혼이 파괴되어간다. 결국 섹스로 이어진 관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불같은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동호는 스스로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가고 만다.


현태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풍족한 돈을 이용해 프리섹스를 원없이 즐기는 인물이다. 결혼이란 관계 안에서 관리되고 제한되어야만 하는 섹스를 그런식으로 자유분방하게 즐기다 보면 점차 성적 충동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된다. 명망있는 나이 지긋한 사회 지도층 고위인사들이 성범죄로 심심치않게 적발되곤 하는 이유다. 한번 탄로나면 나락의 길이 뻔한데도 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현태는 본인의 성욕으로 인해 친구들과 그들의 여자들의 인생까지 모두 망쳐놓고야 만다. 돈이 있으니 자연히 알파메일의 매력을 여자들에게 발산할 수 있었겠지만, 현태를 통해 우리는 혼외정사란 반드시 남자쪽과 여자쪽 모두의 인생을 어떻게든 무너뜨린다는 진리를 엿볼 수 있다. 흔히 남자가 무수한 여자를 자빠뜨리면 마치 일종의 영웅이라도 되는양 자랑거리가 되는 풍조는 그래서 자기파괴적인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관계를 벗어난 섹스는 반드시 영혼이라는 비용을 후불제로 청구하게 마련이다.


윤구는 현태라는 부자 친구에게 붙어서 공짜술과 오입을 수없이 즐겨놓고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 실속만은 칼같이 계산하고 지키는 타입이다. 그러다보니 무슨 일을 하든 성실하고 열심이다. 언제나 수동적인 입장에 서는 것으로 어떤 일에든 자신을 합리화할 준비를 하는 덕에 주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여간해서 죄책감을 갖는 일이 없다. 모두 그들이 원해서 그리 된 일이니 나는 잘못이 없고, 무슨 일이든 나만 아니면 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가장 무탈하게 잘 살아남는 사람이 윤구라는 점은 황순원 소설의 리얼리즘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이 5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지금쯤 우리 나라에 윤구같은 사람들이 중산층 이상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인다. 생활력 강하고 실속있는 윤구. 숙이는 동호와 현태를 두고 구원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사실 구원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건 윤구다. 파탄의 경험이 없기에 반성도 깨달음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구에게 인생의 고민거리란 어떻게 닭알을 더 많이 수확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피해의식을 거부하는 피해자와 구원의 관계


숙이는 고결한 꿈을 목숨처럼 지키는 타입이다. 살아 돌아온다는 확신이 없는 군입대를 앞둔 동호에게조차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동호는 그같은 숙이의 마음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못이겨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엇나가버린다. 만약 숙이가 좀더 현실적인 인물이었다면 동호는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숙이는 끝까지 본인 위주의 행동을 현태에게까지 하다가 호텔방에서 현태에게 처녀성을 빼앗기고 만다. 동호에게 그렇게 아끼던 것을 난봉꾼 현태에게 어이없이 줘버린 것이다. 과연 그 상황을 숙이는 절대로 예상하지 못했을까. 눈내리는 날 호텔방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남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까. 동호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알아내고 싶은 마음에 다른 것은 조금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숙이는 동호가 아닌 현태의 아이를 갖고 만다. 동호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다고 여기던 현태의 아이를. 숙이는 동호의 죽음에 이어 또 한번 피해자가 되었다.


하지만 숙이는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가해자를 원망하거나 피해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우울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신도 피해자라고 여기지만 피해의식을 갖는 일만은 거부한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모두가 피해자이기에 누구를 원망한다는 건 맞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알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고 말한다.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가 이 일을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전쟁과도 같은, 피해자만을 양산하는 듯 보이는 이 세상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계속 살아내고자 하는 숙이. 원망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또한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일 수 있다고 여기기에, 오롯이 자기 앞의 생을 감당해내기로 결심한 숙이. 그녀와 그녀 뱃속의 현태의 아이는 과연 전쟁같은 세상에서 구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길을 양심껏 걸어가다 보면 비탈에 선 나무에게도 구원의 빛이 다가올 것인가. 어쩌면 혈흔이 난무하는 전쟁같은 이 세상은 그렇게 피해자로 남기를 거부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유지되는 것일까. 소설은 그렇게 왠지 모를 희망적인 비장함을 여운으로 남기며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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