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추앙해요. 난 한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사랑으로는 안돼.”
실패한 남자, 처럼 보이는 남자. 사연은 많고 가진 건 없는, 공장에서 받는 주급으로 술 사먹는 게 유일한 일인 남자에게 번듯한 대기업 다니는 여자가 어느날 밑도 끝도 없이 던진 말이다. 여자가 볼 것 없는—하지만 매력이 아주 없지는 않은—남자에게 고백인 듯 고백 아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술자리 푸념속에 들어있다.
“찬혁 선배 만날 때, 직장 그만두고 사업한다고 했을 때 좋았어. 사람들이 남친 뭐하냐고 물어보면 ‘사업해’ 그 한마디가 있어보여서. 근데 너무 잘나가니까 불안했어. 우린 결혼도 안했는데. 불량으로 계속 반품 들어오고 점점 어려워지면서 어느 때보다 옆에 붙어서 잘해줬어. 들킨 거 같았어 내가 안도하는 거. 누구랑 있으면 좀 나아보일까, 누구랑 짝이 되면. 그렇게 고르고 골라 놓고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응원하진 않아. 나보단 잘나야 되는데 아주 잘나지는 말아야 돼.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다신 그런 짓 안해. 잘 돼서 날아갈 거 같으면 기쁘게 날려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린.”
여자는 각도기 들고 이리저리 재가며 하는 반복되는 연애에 텅 비어버렸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텅 비어있던 걸 채울 수 없었던 것일 뿐일까. 여자는 가득 채워지고 싶고, 무조건적인 응원에 고프다. 그래서 남자에게 다짜고짜 날 추앙하라는 이상한 말을 해버렸다.
'높이 우러러보다'라는 의미의 추앙하다. 여자는 사랑으로는 안 된다고 했다. 각도기 들고 재는 와중에 밥 먹고 영화보고 섹스하는 연애로는 채워질 수 없으니 높이 우러러봄을 당하면 혹 채워질까 하는 마음었을까. 그런 여자에게 남자는 말한다.
“넌 누구 채워줘 봤어?”
평소 벙어리처럼 말이 없는 남자가 툭 던진 한마디가 여자의 가슴에 칼날처럼 들어가 박힌 듯, 여자는 마음을 고쳐먹는다. 남에게만 나를 추앙하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서로를 추앙하자고, 받을 생각 하지 말고 주기만 하자고, 다가오는 겨울까지만 그렇게 서로를 추앙하면 봄이 올때쯤 우린 다른 사람이 되어있지 않겠냐고.
그래서일까. 톡을 '읽씹'하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그런 보복은 안해요. 남자랑 사귀면서 조용한 응징과 보복, 얼마나 많이 했게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너무 좋아요.’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나의 아저씨>를 집필한 박해영 작가의 신작이라고 해서 찾아본 <나의 해방일지>. 역시 초반부터 신선한 대사가 난무한다. 살인 전과를 가진 소녀가장 비정규직 여자와 대기업 부장 아저씨의 만남이라는 설정의 <나의 아저씨>에 비하면 너무도 평범한 설정에 인물들이지만 그래서 더 작가의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작가가 세상에 보여줘야 하는 건 ‘새로움과 양심과 고민의 흔적’이라고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