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갓 태어나면 엄마 젖을 욕심낸다. 두어 식경마다 젖 달라고 자지러지게 울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려 운다. 그러다가 이유식을 욕심내고, 더 자라면 장난감을 욕심내기 시작한다. 욕심이 날 만한 장난감을 많이 가진 아이는 또래집단에서 권력자가 된다. 권력을 가진 아이는 더 좋은 장난감을 많이 가진 아이가 나타나 권력을 빼앗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2차성징이 발현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와는 종류도 다르고 차원도 다른 욕심이 생겨난다. 자기 신체와 이성의 신체의 특정 기관을 활용해 느낌이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이다. 이 새로운 욕심은 너무도 강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을 죽을때까지 괴롭히면서 이런저런 남부끄러운 비양심적인 일들을 하게 만든다.
여자를 끔찍하게 아끼는 남자, 남자에게 끔찍이도 잘 하는 여자는 사실 대부분이 이 욕심에게 지배당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느낌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을 혹시 채우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서,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그것이 정말 사랑이라면 상대방의 행복이 더 중요해야 하지 않을까.)
같은 관점에서, 완벽주의자라 불릴 정도로 일에 매진하는 것도, 운동과 식단을 칼같이 하는 것도, 시간을 쪼개 틈틈이 공부와 독서를 하는 것도,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도 그저 어린 아이가 장난감 욕심 부리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욕심일 수 있다. 욕심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추앙받는 ‘열심’과 ‘성취’란 것은 사실 ‘욕심을 눈에 띄게 많이 채운 케이스’ 정도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런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란 서로의 물질적, 정신적 욕심을 채우는 데에 도움이 되어줄 ‘욕심 품앗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내가 상대방의 욕심 채우기에 도움이 되거나,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성립하는. 껍데기 같은.
누굴 믿을 수 있을까. 장난감을 놓고 떼쓰고, 울고, 내던지고, 숨기고, 빼앗고, 쥐어뜯는 어린이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누굴 믿을 수 있을까. 나 좋다고 달려드는 저 사람이 그저 자기 욕심에 충실할 뿐이면서 사회적으로 추앙받는 이미지를 가면처럼 뒤집어쓰고 접근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내가 가진 장난감에 만족할 수 있는 아이, 좋은 장난감을 원하지만 그걸 가진 친구를 질시하지는 않는 아이, 아무리 좋은 장난감이 가지고 싶어도 엄마한테 거짓말로 돈을 타내거나 가게에서 훔치지는 않는 아이. 남들 다 있는 욕심 자기한테도 똑같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양심을 벗어나서는 단 한개의 사소한 욕심도 채우기를 거부하는 사람. 그렇게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놓아버리는 사람. 그렇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와 싸우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 힘을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는 사람. 그런 사람 말고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