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러비 Sep 13. 2024

전쟁영화를 보는 이유

도파민 중독자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어쩌다가 전쟁영화만 골라 보게 되었을까? 사실 마니아라고 하기엔 영화 자체도 많이 보진 않지만 가끔 ott에서 영화를 고르다 보면, 어느새 전쟁영화를 죄다 쓸어 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예전에는 전쟁영화가 너무 잔인하고 비극적이어서 잘 보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30대가 된 나는 이제 전쟁영화가 없어서 아쉬어하고 있다. 나는 군대도 간 적 없고, 총기나 포, 군함, 전투기에 대해 아는 것도 일절 없다. 액션물도 딱히 좋아하지 않고, 특히 히어로물 영화는 안 본 지 꽤 됐다.


그런데도 내가 전쟁영화에 맛 들이게 된 데는, 추측건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실제로 있을 법한, 혹은 정말 실화 바탕인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주인공들을 동경함.

두 번째, 내 내면에 있는 파괴본능 또는 자극제


두 번째 이유는 나조차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언젠가 내가 전쟁영화를 좋아한다는 걸 안 친구가 뭔가를 다 때려 부수고 싶냐고 물어봐서, 정말 그렇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처음 전쟁영화를 보게 된 계기도 아마 두 번째 이유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 시기, 나는 한창 우울의 늪에 빠져있었고, 기분전환 할 만한 것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영화를 보고 나서 갑자기 감정에 생기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날아가고 피가 터지는 영화를 보면서 생기가 돈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우울이라는 것이 얼마나 세상을 무채색으로 만드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면… 뭐 아무쪼록 이해해 주길 바란다.

물론 영화가 끝나고, 모든 영화의 소리가 사라지자 주변의 어둠과 적막에 더욱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전쟁영화에 더욱 끌리게 됐다.


하지만 내가 만족할 만한 퀄리티의 전쟁영화는 생각보다 별로 없었고, 그렇게 자극을 좇는 내면의 파괴본능은 강제로 멈추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꼭 전쟁영화가 아니더라도 첫 번째 이유에 해당하는 영화들만 골라서 보기 시작했다. 전쟁, 혹은 극한에 몰려있는 어떤 (실제 또는 실제 같은)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기어코 성취해 내는 것들은 무기력한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가끔 나와 주인공들의 크나큰 간극에 쓴 맛이 느껴지긴 했지만 언젠가는 나도, 어쩌면 저렇게 늙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누군가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sf와 전쟁영화 쪽을 좋아한다고 답하는 게 조금 멋쩍기는 하지만, 그게 내 확고한 취향인데 뭐 어쩌겠나. 그래도 가끔은 로맨스와 코미디 쪽도 본다. 액션도 본다. 공포도 가끔은 좋지만 보고 나서 기분이 더러운 스릴러는 그다지.


다행히 지금은 인생무상과 스트레스에서 밀려오는 무기력과 우울에서는 많이 벗어났다. 파괴적인 생각 역시. 그래도 가끔 인생이 지루하고 도파민을 충전하고 싶을 때면 영화를 찾아보곤 하는데, 이제는 2시간짜리 영화를 집중해서 보는 것도 뭔가 힘든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가 찾은 다른 자극제는, 바로 공포물이다. 하지만 일상에 많은 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현실감 넘치게 표현해 놓은 2시간 짜리 공포영화들은 하나도 보지 않았고, 조금 무서운 공포게임 영상, 심야괴담회 같은 걸 찾아보곤 한다. 짧고 가볍고, 심각한 내용에 몰입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이것도 요즘 트렌드에 맞는 변화인가 싶다. 


사실 이런 자극적인 것들은 아예 다 끊어버리는 게 가장 좋긴 하다. 한때 쇼츠에도 중독돼서 아예 유튜브 추천 기능을 막아버렸는데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안보는 것도 아니고, 검색해서 찾아보게 되지만 아무튼 선택할 여지는 있지 않은가. 그 시간에 어떤 유익하고 재밌는 걸 하고 싶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작가의 이전글 어느 날 해외축구에 스며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