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여름
작년의 여름은 온통 성공에 대한 집착과 혼돈의 도가니였다. 사실 여름뿐만 아니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면서, 동시에 조급해지며 무언가 모자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마음 한구석이 매우 불편한데 이유를 모르겠다. 고여있는 느낌, 희망회로만 돌리는 느낌, 아등바등해 내려고 기를 쓰는 느낌이 든다. 서서히 부정적 감정과 스트레스와 분노가 몰려든다. 그 와중에도 생각과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더 힘들다. 풍요롭고 자유롭고 부유해지고 싶지만 그게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평화로워지고 싶다. 그렇지만 나는 나에게 끊임없이 지시하고 강요한다.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주저앉고 결과는 자괴감이 드는 것으로 끝난다. 성공하고 싶은데 자꾸 의문이 든다. 다 내려놓자고 생각하지만 금세 다시 손에 움켜쥐길 원한다.
'자기 계발'서적을 읽으면 모든 것에 감사하라고 한다. 상상하라고 한다. 저항 없는 상태를 만들라고 한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한다. 알겠는데 모르겠다.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책에는 꽤 구체적인 방법도 알려주었다. 잠 자기 전, 지금 기뻐하는 모습을 그리라고 했다. 멋진 기분, 감사한 기분을 느끼는 것. 그러면 이루어진다는데 나는 왜 그 행동에도 저항감이 드는지. 하면서도 와닿지 않았고, 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성공한 느낌에 잘 도취되었다. 긍정적인 것 같았고,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건 착각이었다. 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긍정적인 척했던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소모되었다.
어떤 날은 긍정적인 느낌은커녕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했다.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신경질이 났다. 솔직히 이유를 알 수도 없을 정도였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내가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내 기분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업 다운이 반복되었다. 그건 꽤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10대, 20대를 이미 그렇게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2023년 10월을 맞이했다. [현존수업]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10주간 명상을 시작하게 됐다. (책이 그렇게 구성돼 있다) 딱히 변한 건 없었다. 그저 마음이 조금 안정된 느낌이 간혹 들곤 했다. 여전히 삶은 복잡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 해야 한다고 믿는 것들도 많았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다. 너무 많아서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아침 15분, 저녁 15분씩 명상을 할 시간과 여유를 확보한다는 건 생각보다 꽤 힘든 일이었다. 명상에 저항감이 들 때, 이것이 나를 위한 유일한 휴식시간이라는 걸 되새기면 조금 할 만했다. 조금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여지없이 기분 나쁜 일이 생겼다. 마치 날 시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12월이 되자 10주간의 현존수업이 끝났다. 그렇게 나는 별 일 없이 2024년을 맞이했다. 그즈음 읽게 된 또 다른 책이 [상처받지 않는 영혼]이다. 현존수업보다 읽기 편하지만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나오는 심오한 내용에 감탄이 나왔다. 그렇게 이 두 권의 책은 내 인생 책 리스트 1위에 올랐다.
1월 5일, 나는 현존수업 2회 차를 시작했다. 시간이 엄청나게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삶이 점차 단순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나도 그게 편하게 느껴졌다. 더 단순해져서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아주 어렸을 때 있었던 일들도 가끔 생각이 났다. 아니, 꽤 다양하게 기억이 올라왔다. 나는 내가 오래된 감정들 속에 갇혀서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확실히 나는 작년과 같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서는 많이 빠져나온 것 같았다. 이제 괜찮아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자만이었지만. 현존수업 2회 차가 끝나갈 무렵 나는 일상에서의 나의 습관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너무 무의식적으로, 자동반사적으로 행해지던 습관인지라 그때까지도 나는 나의 행동을, 습관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속에서 바로 열불이 난다거나 하는 일이었다.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 예민하게 굴고, 자주 짜증을 내고 그들을 통제하기를 원했다. 또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 언제나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 나오는 습관은 아무리 감정을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여도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 이렇게 매번 휩쓸리고 마는 내 모습이 정말 답답했다.
그래서 다시 3회 차를 시작했다. 그때 순간순간은 깨닫는 것 같지만 지속하지 못하는 모습, 일상 속에서 쉽게 감정에 휩쓸리는 모습에서 벗어나, 기타 등등의 신념들을 아예 말끔히 비우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3회 차에도 나는 많은 것을 발견했다. 습관적으로 어깨, 목, 눈에 힘을 주고 있었던 것(그래서 그렇게 뻐근했다보다), 가족들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 것,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는 흔들린다. 나는 아직 다 알지 못한다. 그래도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자기 합리화와 비슷하게 느껴지겠지만 내 경험상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자기 합리화를 해도 그 밑에 깔려있는 불안과 의심과 두려움은 여전히 끓어오르고 있다. 그 감정을 느끼는 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회피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감정을 느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답은 정말이지 정면돌파밖에 없었다.
'2023년은 어떻게 끝날 것이며 일 년 뒤의 나는 또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 상상이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씁쓸한 일이다.' - 에라 모르겠다 1편
1년 전에 쓰고 방치해 둔 1편의 윗 구절을 보고 나는 이 글의 다음 편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일적인 부분만 봤을 때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 마음 상태만 비교하자면 작년과 꽤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지금 내 일상적인 환경도 역시 달라졌다. 작년보다 더 쾌적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달라질 것이다. 며칠 전 현존수업 3회 차도 끝났다. 좋은 점은 이제 명상이 내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이미 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감정과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좋아졌다.
에라 모르겠다, 이 말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바로 비관의 의미와 낙관의 의미이다. 비관적 의미로는 과거의 나처럼 인생무상, 허무주의에 빠져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낙관적 의미로는 지금의 내가 추구하는 것처럼 인생 뭐 별거 없으니 하루하루 즐겁게 살자는 것이다. 모든 게 한 끗 차이다. 자신의 관점, 해석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특수한 상황은 일단 제외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이 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2024년 여름이 한 달 넘게 남아있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 나도 이제는 덥다. 그렇지만 또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가을이 오고, 추위에 떠는 겨울이 올 것이다. 그리고 또 2025년 새해가 오고, 다시 사계절의 순환이 시작된다. 예전에는 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은 1년 365일이 참 덧없게 느껴졌지만 언젠가부터 그저 신기하게 느껴졌다. 바로 회사를 다닐 적, 점심을 먹고 주변을 산책할 때마다 매일이 다르게 변화하는 자연을 제대로 알아차리게 된 다음부터. 이렇게 하루하루 변하고 있었구나,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그러니 1년 뒤를 생각하며 지레 낙담하거나 희망을 갖는 일은 사실 별로 중요치 않은 일이 아닐까? 어차피 1년 뒤의 미래는 오늘의 나 하나하나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렇다고 이 말이 하루 쉴 틈 없이 공부하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일하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그건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마치 여행의 마지막 날처럼 모든 것을 음미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일상에서도 항상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