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갈잎의노래 Jun 23. 2024

기도하는 사람들

모스크의 기도자들


당신은 기도를 드리는가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는가    

 

나를 위해서인가.

너를 위해서인가.

우리를 위해서인가.          


그들은 신께 무엇을 소망하는 것일까.

모스크에 흐트러짐 없이 줄지어 무릎 끊은 사람들은 무엇을 갈구하는 것일까.

신앙 고백을 선서하면서 어떤 허물을 참회하고 용서를 비는 것일까.      



무슬림은 하루 다섯 번 기드를 올린다. 통틀 때, 정오에, 오후에, 해 질 녘에, 밤에 의무적으로 기도를 올린다.

하루 다섯 차례나 기도 시간을 안내하는 예배 알림이인 아잔의 음성 울다. 찢을 질 듯 애절하면서도 카랑카랑한 기도 안내 음성은 사원의 스피커를 통해 도시 전역으로 울러 퍼진다.


하루에 다섯 번 기도는 생활 속에 종교가 녹아들어 있음을 말다. 기도 생활이 일상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다. 집단으로 모스크에 모여 늘 기도하는 종교적 관습은 무슬림의 정신적인 일체를 도모하고 사회적인 결속을 공고히 한다.   

  


이스탄불은 성과 속이 섞여있는 도시이다. 개개인의 일상생활과 종교 생활은 친화적이다.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삶이 밀접하게 엮여있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주일예배, 주일 미사 형태로 예배 날짜와 시간, 형식이 특정화되어 있다.


반해 무슬림 사원은 항상 개방되어 있다. 하루 중 수시로 모스크로 발걸음을 옮겨 예배하고 기도하고 묵상한다. 신을 찬양하고 자신의 심정을 신 앞에 고백한다. 세속 생활에서 종교적 규율과 법도에 어긋난 행위들은 없는지 돌아본다. 행여나 과오가 있다면 신께 용서를 구한다. 성과 속이 통합된 이슬람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우리는 속세에서 늘 진실되게 살아가기 어렵다. 특히 물욕의 유혹을 쉽사리 뿌리치기 어렵다. 속세의 생활을 해나가려면 물질적인 생활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물욕에 약하다.      


현실적인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 경제적 재화는 생존 지속성을 좌우하는 지렛대가 된다. 은연 중에 물질 소유의 욕망을 누구나 내면적으로 강하게 갖지 않을 수 없다. 생존 본능을 충족하려면 물질 본능은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적당히 소유욕에 집착하는 태도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문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는 데에 있다. 소유 욕망의 한계선이 지워졌다는 이다. 끊임없이, 끝없이 추구하는 소유 욕망의 질곡에 매여 버렸다. 이 과정에 파생되는 탐욕, 과잉 소유욕, 지나친 물욕은 그 대가로 인간성을 점차 상실시키고 있다.          


기독교 성경에 ‘청지기’의 비유가 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임시로 맡아 관리하는 재산 관리인이다.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한 청지기는 나중 주인에게 칭찬받게 된다는 비유이다. 우리의 소유도 청지기와 같다. 임시로 재산을 보관, 관리하다가 떠나는 것이다, 나의 소유는 언제까지나 내 것이 될 수가 없다. 나의 소유물은 한시적으로 내게 속해 있을 뿐이지 영구히 나의 소속물이 될 수 없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들이 다하면 청지기처럼 우리의 소유물을 반환해야 한다. 생애의 끝 자락 빈털터리로 마무리 짓고 모든 것을 던져버린 홀가분한 상태로 떠나게 된다. 나의 소유는 언젠가 모두 내 손을 떠난다.

이렇듯 스러운 지혜는 속물 가치에 젖은 우리에게 간절히 충고하지만 우리는 를 닫았다 .    

      


무슬림은 모스크에 가면 따로 종교 행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없다. 개개인의 신앙에 신과 개인(평신도)을 중재하는 사제가  필요하지는 않다. 신과 신는 일대일로 신앙적으로 대면할 뿐이다.      


물론 예배를 주도하는 성직자인 이맘(imam) 제도가 있기는 하다. 평신도들이 모인 소규모 예배 그룹에서는 이맘이 종교 행사를 인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혼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자신이 이맘이 되고, 가족 예배를 드릴 때는 가족 구성원 중 제일 연장자가 이맘의 역할을 한다. 기독교의 체계화된 성직자 체계와는 결이 다르다.

     

서구 중세 시절 종교권을 독점한 교황과 신부는 신의 대리인으로 자처했다. 자신들만이 신의 말씀을 온전히 설파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의 강론은 곧 신의 음성이었고 그들의 설교는 신이 내린 교시였다. 일반 신도들은 성경을 볼 수도 없었다. 신앙의 근간인 신의 섭리가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다. 이런 연유로 성경의 가르침을 읽고 깨칠 수 없었다. 오로지 교황과 교구 신부들의 전언을 통해 신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다.


신의 뜻은 어느 순간 왜곡되어 전해지고 말씀의 진의는 거짓으로 착색되어 전파되었다. 신과 일반 사람들 간에 골은 깊어졌다.         

  

이렇게 타락한 상황은 종교 개혁의 불씨가 되었고 종교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을 불러왔다. 신의 이름으로 온갖 부조리가 난무하는 곳에 개혁의 칼바람은 불어닥쳤다. 곧 서구권 기독교 국가 대부분은 종교 개혁의 거친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개별 모스크에는 종교 행정 조직체가 느슨하다. 딱히 모스크를 관장하는 사제나 교권 지도자가 없다. 서구 기독교처럼 신부, 목사가 신도를 인도하는 체계화된 사목 제도가 없다. 모스크 예배 시간에 누구나 똑같은 자세로 경배하는 모습에서 신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신념이 엿보인다.   

        

무슬림에서는 일상의 신앙 행위를 중요시한다. 그렇기에 하루 다섯 번 기도하는 종교 의례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주변에 사원이 없거나 기도를 할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어느 공간에서나 심지어 길 위에서라도 메카를 향해 경배를 올리면 된다.      


끊임없이 세속에서 성스러움을 떠올리고 묵상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을 더욱 청결하게 한다. 이들의 일상의 신앙심은 속세의 부도덕성들이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타락으로 떨어뜨리지 않도록 견제하는 복심이 된다. 초심으로 되돌아가도록 경고하는 영혼의 길잡이 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종교적 의무로서 오행의 의무를 강조한다. 오행에서 종교적인 행위의 의무는 네 가지다. ‘샤하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썰라트’는 하루 5번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써움’은 라마단 금식 규율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핫지’는 일생에 걸쳐 한번은 메카 성지를 순례하라는 의미이다.      


특히 여기서 세속 생활에서의 의무를 한 가지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자카트’이다. 빈자에 대한 자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이다. 네 이웃 중 특히 어려운 사람을 염려하고 보살피라는 계율이다. 모름지기 충실한 신앙인이라면 곤궁하고, 약한 사람을 구제해야 마땅하다고 보는 것이다. 자카트는 정화(淨化)라는 의미이다. 어려운 사람을 도움으로써 영혼이 맑아지고 신의 은총도 깊어진다고 본다.     



‘무슬림의 ’ 자카트‘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의 정언 명령과 같다. 결국에는 네 가지 종교적 의무를 아무리 성실히 수행했더라도 어려운 이웃을 위한 자비로운 행위들이 없다면 진정한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는 성스러움과 세속을 모두 보듬는다. 성(聖)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세속으로 뛰어들어 세속의 문제들을 껴안을 때 비로소 성스러움은 더욱 고결해질 수 있다.     


무슬림은 기도를 드릴 때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머리를 바닥에 완전히 닿도록 숙여 온몸으로 절을 한다.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바쳐 신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다짐의 선서이다.     



그들 정성스럽게 기도 다. 성스러운 계시를 감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단아하게 묵상에 잠겨있다. 빈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포용심을 갈구하면서.     


성(聖)과 속(俗)이 단절된 사회, 세속이 성(聖)스러운 영역을 거의 잠식한 시대,

이곳에 갇힌 우리들에게 구원의 손길은 어디에서 올까.            

   

온몸으로 조아리고

온 마음으로 낮아질 때     


신의 계시는 도래하려나..

매거진의 이전글 푸른 빛줄기는 속세를 적시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