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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여자 Dec 16. 2022

퇴사하면 뭐하시게요?

후배에게 보내는 답장

하얀 눈꽃이 내려앉은 나무에서 이따금씩 솜뭉치들이 흩어진다.


바람을 타고 꽃씨가 되어 친구에게 날아가는 모습을 가만 보고 있다가 퇴사하겠다던 내게 질문을 해오던 후배가 생각났다.


이렇게 조용하고 적막한 아침에 창 밖의 설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취한 행복감을 빌어 답을 해볼까 한다.






안녕? 잘 지내?


아침 창 밖으로 마주한 산에 눈이 한가득 덮였어.


쏟아지는 햇볕을 만난 하얀 가루들이 눈이 시리도록 부시다.


너도 봤어? 너무 예쁘지 않니?


창가에서 잔잔한 재즈 캐럴을 들으면서 히비스커스를 따뜻하게 우려낸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가만있는데 문득 네가 했던 질문이 떠올랐어.


너의 말이 오늘뿐 아니라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걸 보면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만한 심도 있는 질문이었나 봐.


사실 뭘 하며 지낼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했던 퇴사라서 너의 질문에 바로 대답을 할 순 없었는데 이따금씩 내 삶이 정리가 안 되는 것 같을 때마다 '퇴사하면 뭐하시게요?' 묻던 네가 생각나.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훨씬 괜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어. 아쉽게도 뭐할 거냐는 너의 대답엔 이렇다 할 대답을 안겨줄 직장은 없어. 앞으로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근데 분명한 건 나 지금 행복하고, 행복하고, 또 행복해.


살아보니 꼭 무슨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기도 하고 이런 내가 훌륭해 보이는 날도 있고 그렇더라.


너와 내가 사회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났더라면 그냥 친구 했을 텐데 아쉽게도 우린 직장에서 만났네. 내가 몇 해 빨리 입사를 해서 너보다는 선배가 되었지만 동갑내기인 너를 딱히 후배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그냥 동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의 벽은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세워진 느낌이 아직까지도 든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서로 공감하고 이해받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너와 나는 환경이 너무나도 달라서 같은 워킹맘인데도 불구하고 이 카테고리만큼은 소통이 안됐던 것 같아.


그래서 사실 너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어. 퇴사를 하면 당연히 다른 어떤 일을 위해 이직을 하는 삶을 내게 물어왔으니 그럴 만 해.


나는 휴식이 필요했고, 내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필요했어.


아쉽지만 너의 시부모님처럼 온전히 손녀 바라기를 해주시는 어르신이 우리 집엔 계시질 않아서 말이야. 난 직장에 할애하는 시간을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못된 거지.


선배들을 봐도 그렇고 오랫동안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 그래도 든든한 지원군은 꼭 한 명 씩 있더라.


내겐 그런 사람이 남편이었지만 그도 점점 지쳐갔고 나도 그랬지. 잠시 숨 좀 고르고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거길 떠나게 된 거야.


그날 나는 너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어.


"지금 하는 일 빼고 전부 다요."


지금 생각해도 온 세상을 한 바퀴 다 돌겠다는 말로 들리긴 한다. 근데 정말 그때 하던 일 빼고는 전부 다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정년이 보장된 그 조직이 너무 좋았어.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져 준다는 계약조건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그곳에 구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 '정년보장'이라는 말이 쇠사슬로 나를 칭칭 묶어 놓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던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시작됐던 것 같아.


회사를 다녀오면 쥐어짜도 한 방울이 나올까 말까 하는 에너지를 갖고 집에서 엄마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 안쓰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아.


이렇게도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한 나의 아이들을 온 힘을 다해 안아주고 쓰다듬어주질 못한다면 지금 내 삶은 과연 행복한가, 나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내 안의 마음이 무엇인가 곱씹어 봤던 것 같아.


아이들이 종알종알 거리며 하는 말들을 놓치지 않고 귀담아듣고 싶었고, 내게 살을 부비며 다가오는 그 고운 살결을 느끼며 최대한 오랫동안 함께 뒹굴고 싶었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오색빛깔 찬란하게 담아 그려온 그림도 집 안 이곳저곳에 걸어두고 오늘도 감상하고 내일도 감상하고 몇 달 후에까지 오래도록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 일 빼고 전부 다 한다고 했을 때 거기에 나는 전업주부도 포함시켰어. 근데 넌 아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사실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가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좀 아쉽긴 하더라.


그래서 오늘 흰 눈을 보고 흠뻑 취한 행복감을 빌려 이렇게 적어봐.


온전히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쓰는 것 또한 퇴사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깐. 모든 시간이 자유롭고 내 것이 되어서 어쩌면 행복감이 더 잔잔하고 깊게 밀려오는지도.


나는 나답게 잘 살고 있어. 생각보다 안녕하고 괜찮게 그렇게 지내. 아주 작은 것에도 마음이 설렐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을 살고 있어.


지금 하는 일 빼고 전부 다 해보고 싶다는 나를 토끼눈을 뜨고 바라보던 너에게 내가 그랬었어.


"나는 보험설계사도 좋고, 학교도 괜찮고, 그냥 백수도 좋고. 하하."


"보험설계사요? 왜 면허증이 있는데 면허증 놔두고 그걸 해요?"

- (꼭 면허증을 오늘 당장 써먹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되진 않으니깐.)

- 저는 사회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삶을 살아본 적도 없고 소속감 없이 사는 것 자체가 두렵고 좀 불안할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


"이미 나는 이 나라에 소속되어 있고, 우리 가정에 소속되어 있잖아. 난 엄마로 사는 그 자리도 좋아."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아. 퇴사를 한다고 해서 소속되는 곳이 아무도 없는 빈 껍데기 된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내게도 회사가 지분을 많이 차지했던 적이 분명 있었어. 하지만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했던 것 같아. 변화할 수 있는 계기에 우리 세 아이가 있었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고.


퇴사를 하는 내게 한 선배가 그랬어.


'여기서 나가 봐.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이 글쎄.... 여자 월급 이만한 곳이 있나. 없을걸.'


본인이 다니는 직장을 높이 사는 자세는 좋은 거지. 다만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은 없을 거라는 그 확신을 내가 검증해 보고 싶었잖아. 그래서 학교에 가서 기간제 교사로 생활해 봤거든. 정말 즐겁고 좋더라. 그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곳 보다 훨씬 더 괜찮았어.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학교로 오는 것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계약기간만을 채우고 학교에 남지 않았던 것은 지금 내 삶은 학교가 아닌 곳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이 없을 거라는 선배의 확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다만 선배가 놓친 게 하나 있어.


"월급이 조금 적어도 괜찮으니 시간이 조금 넉넉했으면 좋겠네요. 요즘 체력이 안 되는 게 조금 쉬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그래요."


내가 한 말을 들어보면 누구라도 알만한 사실을 선배는 놓치더라. 선배는 무엇보다 월급이 중요한 삶을 살고 있는 거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월급날인 줄도 모르고 살고 있었고, 월급날 인터넷뱅킹에 접속해서 잔액이 얼마인지 들여다보는 삶도 살지 않기 시작했어.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건 여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버는 돈만큼 소비가 크지 않으니 항상 잔액이 부족하지 않았고 그래서 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던 거지.


나는 쓸 돈이 필요 없으니 벌 돈도 그렇게 크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 안 벌면 조금 덜 쓰면 되니깐.


너는 월급보다는 소속감인 거지? 그래 메슬로우의 욕구 중에 보면 소속감의 욕구가 있으니깐. 친구나 애인, 가족 간의 사랑, 학교나 직장으로부터의 소속감들이 있지.


나는 이것을 가족에게서 가장 크게 느끼고 너는 직장에서 채우는 거니깐. 너와 내가 틀린 게 아니라 너와 나는 조금 다른 거니깐. 그래. 그렇다는 거지.


아침부터 시작한 나의 답장이 어느새 정오를 넘겼네.


베란다 난간에 고드름이 열렸어. 정말 춥다. 집 안에서 따뜻한 햇살을 쬐고 있어도 이렇게 서늘한데 바깥은 얼마나 추울까. 추운 날씨에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해.


점심 맛있게 먹고 퇴근길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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