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마.
첫 번째 직장은 늘 항상 일하는 사람이 부족하다며 남겨진 사람은 어떡하라는 말이냐며 떠나겠다는 사람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잘 놔주지 않았다.
마지막엔 정말 지금 아니면 붙잡혀서 영원히 이곳에서 썩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서 말리는 사람들 모두의 손을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말린 건 아니다. 기껏해야 관리자급 몇 명이 전부다.
그런데 과연 그분들은 나를 위해 말렸을까?
그땐 그런 줄 알았다.
사회 초년생으로 2년 1개월 동안 일하고 나올 때는 그 조직에서 나의 위치와 역할의 크기에 대해 사실 잘 알지 못했다.
당시 내게 있어 퇴사를 한다는 건 외적으로 매달 정기적으로 납입하던 30만 원의 통장을 유지할 수 없다 정도였고 내적으로는 외적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불안했고 막막했다. 이직이 아니라 단순히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을 늘 갖었다.
불안감이 마음속에 대창궐하는 시기에 그 내면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건 어려웠다.
내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도 어려운데 남의 마음을 어찌 보았겠는가.
그것도 관리자들의 능구렁이 같은 마음을 말이다.
그래서 돌이켜 보니 우습게도 그곳을 떠나 올 때의 나는 내가 대단한 역할이라도 하는 줄로 잠시나마 착각했었고 그들이 나를 정말 필요로 해서 남길 바라는 줄 알았다.
큰 오해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오해가 낳은 결말은 한 켠에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았고 한 동안 짐스러운 고통을 껴안고 살았다.
'나 때문에 스케줄 안 돌아갈 텐데... 남겨진 선생님들 고생하실 텐데...'
지금은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다. 벌써 2008년도 이야기다.
그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길 참 잘했다. 짐스러운 고통을 껴안고 산 지난 시간이 사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째 거나 두 번째, 세 번째 퇴사는 오롯이 나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첫 경험이었다.
두 번째 직장으로 취업을 했을 땐 정말 어리둥절했다.
합격자 명단에 있는 내 이름 석자를 보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했다.
노력해서 혼자 힘으로 어렵게 진입한 장벽이었는데 몇 번이고 정말이냐고 혹시 면접관 중에 아는 사람 있었던 거 아니냐고 몇 날 며칠을 축하와 함께 놀리는 형부만큼이나 나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고 놀라워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누워 잠드는 나날이었다.
면접을 보러 가는 날 아침 형부가 지하철역에 내려주면서 말했다.
"서류야 뭐 어찌 되었을지 모르지만... 면접까진... 아는 사람도 없는데 잘 되긴 어려울 거야. 그래도 면접은 잘 보고 와 봐."
현실이 제대로 담긴 부정적인 이야기 페스티벌을 개최한 형부를 면전에 두고 최선을 다했던 입사 시험이었다.
1차 서류전형, 2차 인적성 및 직무적성검사, 3차 기관면접, 4차 본부면접.
- 참 거창하기도 하다. 4차까지.
첫 번째 직장은 서류와 면접이었으니 두 번째 직장은 그에 비하면 들어갈 때부터 대단했다.
자부심 가질만했다. 그래서 또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로부터 1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르고 다시 퇴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동기며 선후배 그 누구에게도 퇴사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미안해할 이유도 없고 그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을 이유도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바로 결재 권한이 있는 관리자분께 말씀드리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인생은 매 순간이 선택이다.'
이 말이 참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마음 터놓고 지내는 친한 동료들에게는 말할까 잠깐 고민하긴 했었다. 하지만 답은 뻔했다.
나는 그만둘 거였고 그들은 내 자리가 아깝다며 말리는 시늉을 했을 거다.
그때 마지막까지 이 사람한테는 말해야 되지 않을까 고민했던 후배가 한 명 있다.
요즘도 가끔 통화를 하면 늘 같은 말을 한다.
"선생님 조금만 더 참고 힘내셨으면 지금 과장님 되셔서 관리자 셨을 텐데 너무 아깝고 속상해요. 함께 일할 때 정말 좋았는데 너무 아쉬워요."
매번 한결같은 말을 해주는 후배가 고맙지만 나 역시 늘 같은 말로 답한다.
"언니 나도 언니가 너무 좋았고 지금도 좋아요. 좋은 사람이란 걸 아니깐 이렇게 잘 지내죠. 언니랑은 바깥에서 보면 되니깐 아무 문제 될 게 없어요. 그리고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그리고 직장은 참고 다니는 거 말고 즐겁게 다녀야죠."
또 똑같은 말로 묻는다.
"선생님 정말 후회하지 않으세요?"
"네. 네버. 결코. 절대.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단 한순간도."
나보다 7살이 많은 후배였다. 뒤늦게 입사해 7살이나 어린 나를 극진히 선배 대우를 해줬었다. 퇴사하는 날 누구보다 슬퍼하고 아파해줬던 후배였다.
"이제 언니라고 부를게요. 언니는 시원하게 내 이름 불러요."
여전히 나를 선생님이라 칭하는 후배를 매일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회사에서 함께 했는데 지금은 일부러 약속을 해야 만나는 사이가 됐으니 그 점이 조금 불편하다면 불편할까.
그 외에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퇴사였다.
이번에도 이직은 아니었다. 돈으로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조차 없는 아이들의 엄마를 택했다.
하지만 나에게 집중했기 때문에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도 불안함도 없을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세 번째 입사.
궁금해서 가봤다.
8개월의 계약 기간 동안 행복했다.
나중에 이 행복이 그리워지면 다시 또 들러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추천받은 다음 자리는 거절했다.
이 날도 잠시 고민했다.
다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느라 오후 한 나절을 다 보냈다.
처음엔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찾는 게 정말 어렵고 쉽지 않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보인다.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다.
그러니 내게 묻고 내가 대답해야 한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
두 번째 회사에서 사직서가 내 손을 떠난 뒤 사무실 직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가장 먼저 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 저 사직서 제출했어요."
"어머. 내가 해외를 한 달을 갔다 온 거니? 고작 4일인데 이게 무슨 소리야?"
"뭐 그렇게 됐어요."
나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말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떠나는 사람이고 그들은 남을 사람인데 떠나는 사람이 그 조직이 좋으면 왜 떠나겠는가.
어딘지 모르게 싫고 불편하고 나와 맞지 않으니 떠날 결심을 하는 거 아니겠는가.
혹여나 그들의 좋은 직장을 내가 험담하는 꼴이 될까 봐 말을 아꼈다.
과장이 말했다.
"어디 가봐라. 지금 네 연차에 이 정도 월급 주는 곳 있을 것 같아? 없을걸. 여자가 이 정도면 정말 잘 받는 거야. 나가면 후회할걸?"
'뭐라고 짖는 거지?'
멍멍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과장이 이 글을 보게 될 확률은 굉장히 낮지만 그래도 그때 하지 못했던 답을 해보겠다.
1. 어디 가봐라.
- 퇴사하면 어딜 또 꼭 가야 해요?
2. 지금 네 연차에 이 정도 월급 주는 곳 있을 것 같아? 없을걸.
- 돈 많이 필요하세요? 저는 시간이 필요해서요.
3. 여자가 이 정도면 잘 받는 거야.
- 사람마다 잘 번다의 기준은 다르니깐요.
4. 나가면 후회할걸?
- 누가요? 제가요? 왜요? 허허허. 제 마음에 노크라도 한 번 해 보신 적 있으세요?
가짢은 과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가짢아지는 것 같아서 별로였다.
궁금해서 들어갔던 세 번째 직장은 보람됐다. 즐거웠고 행복했다.
두 번째 직장은 왕복 20킬로 미터의 시내권 회사였다.
하지만 세 번째 직장은 길에다 뿌리는 기름과 톨비를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했다.
매일 왕복 140킬로미터를 내달려 오고 가는 길은 또 새로웠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이른 아침의 출근은 콧바람을 일으켰다.
퇴근길 6월의 오후였다.
드문 드문 연락하고 지내던 회사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어떻게 지내냐고 묻길래 근황을 이야기했다.
새로 들어간 직장의 직렬에 대해 굉장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본인도 이직하고 싶다며 좀 자세히 묻길래 기회다 싶어서 날름 다 말해줬다.
과장이 말했던 2번 항목에 대한 답변 수정!
지금 네 연차에 이 정도 월급 주는 곳 있을 것 같아? 없을걸.
- 돈 많이 필요하세요? 저는 시간이 필요해서요.
-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참 많아요.
- 제가 지금 하는 일이 그 정도의 월급도 주고 덤으로 4시 반 이른 퇴근이라 시간은 보너스네요.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이직을 고려한다는 동료에게 뭐 하나 더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급여 명세서까지 보여줘 가며 사실을 말해줬다.
그래서 동료가 이직을 했는가 하면 하지 않았다.
"이 놈의 회사 때려치워야지. 그만둬야지." 한다. 2주 전에도 그랬고 엊그제도 그랬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 회사 밖에서 만난 사람들의 차이점 하나를 발견했다.
기존 회사의 동료들과 안부 전화를 하면 늘 받는 첫 질문은 같거나 비슷하다.
"요즘 일해? 뭐 하면서 지내?" "밥은 먹었어?"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요즘 일하냐고 묻는 질문에는 궁금증이 가득 묻어나서 힘이 가득한데 밥은 먹었냐는 질문은 어쩐지 상투적이고 형식적이다.
그런데 고향 친구나 학교 동창, 친척 등 회사라는 울타리 밖에서 만난 분들과 안부 전화를 하면 첫 질문에 온 힘을 다 쏟아 묻는다.
"밥은 먹었어? 애들은 잘 크지?"
물론 요즘 일 하냐고 혹은 일할 계획이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간혹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질문의 순위는 전화를 끊기 전 나올까 말까 한다.
어째서 다른 걸까.
"요즘 일해?"
"아뇨."
"허허허. 맨날 집에서 뭐 해?"
"그냥 뭐. 이것저것 해요."
"안 지루해?"
"읽고 싶은 책 실컷 읽고 하고 싶었던 거 하면서 애들이랑 시간 보내고 있어요."
"그래. 네 팔자가 상팔자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출근 퇴근, 회사 집, 출근일 휴일로 비교적 그 동선과 하는 일들이 단조롭지만 일을 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매일이 다채롭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뭘 하는지 다 읊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한 순간에 상팔자를 타고난 대한민국 아줌마가 된다.
그런데 말이다.
팔자는 사실 모르겠다.
길 가다 꽃을 보면 멈춰 서서 '너 참 예쁘다. 정말 예쁘네.'
아이가 먼 길로 돌아가자고 하면 체력이 다하는 동안은 '그래. 그러자. 그래볼까?' 한다.
내게는 시간이 충분하므로.
용기 있는 자만이 시간을 얻는다.
고로 나는 시간을 듬뿍 얻었다.
나의 수정 답안이 어쩌다가 과장의 귀에 흘러 들어가면 내심 통쾌 할 것 같다는 상상을 잠시 했지만 면전에 대놓고 하는 복수극이 아니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은 거라는 결론을 얻고 피식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