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여자 Dec 17. 2022

온라인 육아 동지

이 글을 언젠가는 네가 볼 날이 오면 좋겠다.

이보다 더 행복한 주말 아침이 있을까 싶다. 


며칠 전부터 설렘이 가득한 딸아이는 오늘 피아노 학원 주최로 근처 목장으로 놀러 갔다. 친구들과 버터 만들기, 피자 만들기, 동물에게 우유와 건초, 당근 먹이주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계획성 없는 엄마와 달리 적극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는 아이는 며칠 전부터 목장 가는 날 아침 메뉴는 어떤 걸로 챙겨줄 건지 물어왔다. 최대한 간단하고 맛있는 걸로 빠르게 먹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 엄마가 메뉴를 고민하다가 본인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 꼼꼼하게 챙겼다. 또 혹시 엄마가 늦잠을 자서 모임 장소에 지각은 하지 않을까, 평소 공지사항 확인이 늦는 엄마가 모임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도 다시 물어왔다. 평소에도 선생님의 전달사항은 딸이 일러주기 전에 파악하는 법이 없다. 딸이 일러주면 그제야 그래? 하고 묻고는 앱을 열어 공지사항을 확인한다. 여전히 온라인 가정통신문에 영 적응이 안 되는 나는 80년대 사람이다. 


8시가 넘었는데도 어쩐지 해도 없고 날이 어둑하다. 창 밖으로 바깥 온도를 짐작컨대 발이 시려 울 것 같아서 낡았지만 그래도 운동화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부츠를 권해 보았다. 역시나 예쁜 운동화를 택하는 딸이다. '발이 시릴 텐데...' 잠시 걱정하는 엄마를 보며 씩 웃는다. 


"괜찮아. 엄마. 겨울이니깐 발 시려 울 수 있지. 정말 괜찮을 것 같은데?."


여분의 마스크와 머리끈을 챙기고 따뜻한 물을 보온병에 담고 서둘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서늘한 기운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휘감는다. 운전대를 잡으니 손이 시리다. 핫팩을 잘 흔들어서 온도를 올리라고 일러주고 학원 앞까지 가며 아이에게 물었다. 


"좋아?"


"응. 엄마. 나 엄청 기대돼."


"그래. 즐겁게 잘 놀다 와."


몇 마디 나누니 벌써 학원 근처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편의점에 들렀다. 아이가 평소 좋아하는 밀크 맛 뽀로로 음료수를 하나 고르고 미쯔 과자가 토핑으로 올라간 팥빙수를 먹고 싶어 했던 게 생각나서 진열대에서 미쯔를 찾아 어떠냐고 물어보니 싱글벙글 웃는다.


두 손을 꼭 잡고 학원으로 걸어가는데 눈발이 날린다. 소리 없이 조용히 내려앉던 눈이 갑자기 거세진다. 춥다고 몸을 움츠리는 아이의 목이 어쩐지 너무 휑해 보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모여 있는 아이들을 보니 모두 털모자와 목도리, 털 부츠 혹은 패딩 부츠를 신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다. 어쩐지 우리 아이만 추워 보이는 것이 로비로 내려오면서 꾀나 신경이 쓰였다. 


운전을 하면서 큰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겨울용품 박스에서 핑크색 목도리와 모자를 찾아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달라고 부탁 했다. 군소리 없이 그러겠다는 큰 아이가 무척이나 고마운 순간이다.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 딸을 만나 목도리를 둘러 주고 나니 내 몸의 온도가 확 올라간다. 분명 추웠는데 어쩐지 덥다. 즐겁게 잘 놀다 오라고 처음 헤어질 때 보다 한 톤 올려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졌다. 


아침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이왕이면 좋은 재료를 먹이고 싶은 엄마. 좋은 거라 하면 신선한 야채다. 아이가 좋아하지 않는 걸 알면서 후숙이 잘 된 아보카도를 두툼하게 썰어서 계란과 치즈가 올라간 빵 위에 올렸다. 


"엄마 나 아보카도 먹기 싫은데...?"


"그럼 작은 조각으로 넣어줄까?"


"그럼 그럴까."


그래. 인생은 타협이다. 엄마도 양보하고 너도 조금 양보하고. 


딸아이, 남편, 막내, 내 것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고 큰 아이는 소고기 뭇국에 밥을 내어 줬다. 다들 맛있게도 먹는다. 밥하는 아내, 엄마로 사는 이유. 부엌에서 내가 반짝 빛나고 행복한 이유다.






커튼을 걷고 아이들이 틀어놓은 영화 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식탁에 앉았다. 식구들이 다 먹고 난 후 차분히 앉은 이 시간이 좋다. 책에서 아이들과 겸상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하지만 아침은 늘 혼자 먹는 게 여유롭고 편하다. 


한 겨울엔 자고로 팔팔 끓는 물을 부어주는 게 인스턴트커피의 묘미인 것 같다. 요즘 전기 드립포트에 전원을 켜는 일이 잦다. 물이 끓는 소리가 기다려진다. 딸깍 하고 빨간 불이 없어지면서 목표로 하는 온도가 됐다. 조심히 들어 머그잔에 부어 내 몫의 커피를 만들면서 생각한다. 


'참 쉽다.'


향이 좀 옅어도, 맛이 좀 덜해도. 쉽고 간편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내 몫의 샌드위치에는 아보카도가 겹겹이 올라갔다. 아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 먹으면 안 돼?'묻는 나무의 버터. 보드랍고 촉촉한 이 맛의 진가를 알려면 '그래 서른은 넘어야지.' 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내 빵 위에 죄다 올렸다. 엄마 혼자 건강해지기 싫은데 어쩐지 초록색 아보카도가 내 몸을 정화시켜 주는 기분이 든다.






인스타를 열었다. 


밤새 인친들의 기록이 쏟아진다. 


한참을 내려보니 좋은 소식이다. 


댓글을 달았다. 


'당선까지 된 거야?(하트) 나 울어도 되니?(눈물) 진심 눈가가 달아오름(눈물) 너무 기특한 거 아니니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좋은 엄빠 조부모 덕분에 바르게 똑똑하게 건강하게 자라나 봐(하트) 너무 대견하다!!!!!!!!!'


친구의 댓글이 달렸다. 


'ㅠㅠ진짜 쓰는여자(브런치닉네임)야아~~ 고마워 정말(하트) 진심 어린 축하에 나도 갑자기 뭉클햐~ 얘는 도전이 좋은 거 같아~ 명예욕이 ㅋㅋㅋㅋㅋ'






친구 아들이 전교 부회장에 당선됐다.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전달이 잘 됐으면 좋겠어서 뿌듯한 내 마음을 듬뿍 담아 내 게시물에 다시 글을 올렸다. 




제주도에서 강원도에서 각자 키우는데 

왜 난 OO을 직접 만나고 보고 키운 듯 

진한 감동이 밀려오는지. 

어려운 육아 함께 해낸 동지의 아들이라 그런 걸 테지. 

우리 이만큼 키우느라 

참 애썼다. 

멋지다. 우리 엄마들. 

내 아이의 당선처럼 참 좋다. 


훈남 오빠 부회장 당선 축하해(폭죽)

친구의 너무 괜찮은 훈남 아들을 보통

엄. 친. 아.라고 부르더라 (엄지 척)


@친구소환




태그까지 달아가며 글을 마무리했다. 


친구의 댓글이 달렸다. 


'우린 마음으로 같이 애를 키운 사이야. 그렇지? 난 너의 글에 많은 힘을 얻었지, 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서로에게 힘이 된다는 게 이런 건가 봐. 진심으로 고맙고 또 고마워(하트)'


울컥 목구멍으로 뭔가가 차오른다. 그 때의 감정들이 마음으로 다시 스미며 먹먹해진다.


'고마워해 줘서 내가 고맙다(하트) 진짜(하트) 아이들 진심으로 사랑하고 예쁘게 키우는 친구, 그의 부모님을 보면 나도 저렇게 더 예쁘게, 더 사랑 주며 키워야지 다짐하고 그랬지(하트) OO네 가족 카카오스토리가 그 어떤 육아서보다 나한테 도움이 많이 되었어(하트) 특히 너의 아버지^^날 춥다. 감기 조심해'


너무 행복한 아침이다. 


내 마음을 이렇게 쉽게 전할 수 있는 SNS가 이토록 고맙다니. 


시대를 잘 만나 온라인으로 육아를 함께 했던 친구. 고등학교 동창인 그녀와 사실 가깝게 지낸 적은 별로 없다. 몇 번 놀기는 했지만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친구는 아니었다. 친구는 유아교육과를 갔고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었고 내가 육아를 시작할 즈음엔 원장님이었다. 


큰 아이를 키우면서 어린이집에서 아동학대를 겪었다. 


며칠 밤을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의 음성, 체념한 듯한 얼굴로 아침에 등원 하던 아이 얼굴.


듣고 보았지만 첫 기관에서 적응기간이라 처음에는 다 이럴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믿고 '그래 그럴 거야' 생각하고 의심하지 못했던 둔하고 눈치 없는 엄마였다.


목욕을 시키며 양쪽 유두 옆으로 멍 자국을 발견하고 손을 떨던 내 모습, 미어지던 마음, 선생님을 향한 분노, 워킹맘의 죄책감, 아동학대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정말 해야 하나 고민하던 내 마음을 이기심이라 생각했던 나, 육아를 도와주는 주변 사람이 없는 내 처지, 다른 기관에 아이를 맡기기도 전부터 끓어오르는 불신, 의사를 찾아가 진단서를 떼고 아동학대 신고를 하던 절차, 시청 직원이 나와 사진을 찍으며 했던 조사, 진실을 요구하며 경찰을 향해 쏟아내던 눈물 섞인 나의 말들, 의심은 되지만 증거가 없는 모호한 상황 속에서 경찰도 내리지 못하는 처벌, CCTV가 없었던 기관을 보냈던 나를 향한 질타, 아이를 기관에서 퇴소시키는 걸로 모든 걸 마무리해야 했던 억울함, 분노와 혼재된 슬픔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던 아이 아빠의 얼굴.


이 모든 걸 잠재우기에 나 혼자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했고 친구에게 손 내밀었다. 나는 읊조렸고 친구는 들어줬다. 다른 직업도 아닌 이 일과 관련된 어린이집 원장님으로 일하는 친구는 이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누구보다 힘들고 불편했을 텐데 그저 나는 조금이라도 육아 기관의 생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 이기적 이게도 친구를 붙들었다.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한 건 친구의 따뜻한 손길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세 아이를 키우며 무수히 많은 기관들을 내 눈과 촉으로 검증하는 시간을 거치는 동안 친구를 통해 세상에는 좋은 선생님이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었다.


그때부터 이 친구는 내게 존재 자체가 힘이 되어 주었다. 그냥 이 지구상에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오는 화살을 막아 줄 수 있는 단단한 성벽처럼 느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여러 번 물었다. 친구는 온화한 오은영 박사님이 되어 본인의 생각을 말하면서도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최대한 담백하게 이야기를 건네주었다. 여전히 그 말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담백한 처방이 나에게 약효가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80년대생인 우리가 29살에 동시에 첫째 아이를 낳았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쉽게 끊기던 고교 동창생의 일상과 안부를 손쉽게 엿보고 물을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그 덕분에 친구의 아이가 무사히 백일을 넘기고, 오물오물 이유식을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장아장 걸으며 치른 돌잔치도, 두 돌, 세돌을 넘기며 큰 풍선을 놓고 가족들과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모습도 다 지켜보았다. 


학교 다닐 때 유행을 선도했던 친구답게 아이 옷도 센스 넘치고 감각 있게 구색을 잘 맞춰 입혔다. 내게 없는 그런 감각이 부러웠고 친구가 이용하는 인터넷 단골집을 나도 같이 구독하고 친구가 찍어 올리는 사진 속의 아이 코디를 나도 몇 번 따라하며 내게 없는 패션 감각을 배우고 익혔다. 


교복에 회색 면 스타킹이 유행하던 시절. 회색 면 스타킹을 가장 먼저 입고 교실로 들어오던 친구였다. 도톰하고 따뜻하면서 우리 학교 교복과도 꾀나 어울렸던 그 스타킹을 순식간에 유행시켜버린 패션 감각이 있는 친구가 학생때나 애엄마가 되서나 여전히 멋져 보였다.


그렇게 아이들이 다섯 살, 여섯 살...... 열한 살이 되는 동안 카카오스토리에서 인스타까지 매체는 변했지만 우리는 꾸준히 소통했다. 


몇 년 전인데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SNS 댓글이었던지 카톡이었던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친구의 메시지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내가 어려웠던 시기에 내게 손 내밀어 줬던 고마운 친구, 그때를 절대 못 잊어. 고마워.' 했다.


한동안 마음이 심하게 아려왔다. 학교 다니면서 마음 한 번 안 다쳐본 사람이 있을까. 나도 그랬었다. 놀던 무리에서 사소한 오해로 며칠 동안 친구들이 나를 멀리하던 기억이 있다. 이게 이렇게 나를 외면할 일인가 싶었지만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당해야 했던 그 며칠이 괴로웠다. 


그런 나처럼 친구도 그랬었다. 친구가 정말 친하게 지내던 무리가 있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무리의 아이들은 친구를 대했고 친구는 그저 이유 없이 당해야 했다. 그런 상황이 너무 싫었다. 난 그래서 무리 지어 친구 맺는 게 싫다. 돌아가면서 순서 정해놓고 괴롭히면서 다음은 내가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는 그 생태계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싫다. 


그저 그냥 보는 것 만으로도 힘들었던 그 며칠 동안 친구와 몇 마디 나눴었다. 급식실과 화장실도 같이 다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내 시야에서 친구를 살폈다. 친구가 행여나 고개를 떨구고 울지는 않을까, 마음을 크게 다치지는 않을까 유심히 관찰했던 기억은 똑똑히 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오해를 풀었고 친구는 평소처럼 무리로 돌아갔다. 친구가 예전처럼 다시 웃고 그들 사이에서 마음 다치지 않고 편하길 빌었다.


친구가 못나서가 아니라 그냥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이클에서 희생당할 누군가가 필요했고 우리 무리에서는 그게 나였듯, 친구도 역시 그랬던 거다. 


나라고 잊었을까. 그 며칠을. 나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부족해서 못나서 생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후로는 그 일만을 기억할 뿐 그때의 아픔과 슬픔, 치욕스러움은 지우고 없앴다. 


친구도 그러길 바랬다. 다 지워버리고 아무것도 남겨놓질 않길 바랬는데 친구가 그때 고마웠다고 마음을 전해왔다. 


고마운 마음을 아팠던 기억까지 꺼내 적어가며 고맙다고 말하는 친구의 용기가 나 역시 정말 고마웠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내 머리가 분류했고, 내 마음에 저장했다. 


온라인 육아 동지로 다시 만난 친구네 친정집은 항상 시끌벅적하고 유쾌하고 사랑이 넘쳤다. 친구의 두 자녀가 커나가는 과정에 사랑을 듬뿍 주시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녀의 동생들은 누가 봐도 든든한 지원군이자 아낌없는 나무 같았다. 남편과 사랑 넘치는 모습, 친정 부모님의 눈에서 꿀이 떨어지던 모습을 보면서 '너무 보기 좋다.', '정말 너무 예쁘다.' 그때그때 아낌없이 느껴오는 감정들을 친구에게 전했다. 


그렇게 우리는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11년 동안 온라인에서 육아 동지로 전투를 해왔다. 내무반에서 쌓은 전우애는 아닐지라도 온라인에서 쌓은 동지애가 어쩌면 더 가슴 절절하고 애틋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오늘이다.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마운 친구. 

너와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엄마가 된 것은 내게 크나큰 행운이었어. 

나도 너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친구가 되고 싶다. 


여유 있게 제주도 내려가면 꼭 술 한잔 하고 싶다. 

너와 단둘이.   


이 글을 언젠가는 네가 볼 날이 오면 좋겠다. 

다시 한 번 나의 마음이 너에게 닿기를 소망해.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들에게도 워라밸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