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이모의 북클럽에서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함께 읽고 있다. 가족들의 기억과 매체에 남겨진 기록들을 통해 돌아가신 여성 예술가 심시선 여사의 삶을 들여다보는 구성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심여사를 기억하는 한 여성 화가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인터뷰의 제목은 '그때 나를 일으켜 세운 한마디'였다. 그녀는 그림을 좀 더 크게 그리라는 심여사의 말에 웅크리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동안 "부엌 뒷방, 작업실 같지도 않은 작업실에서 작은 캔버스에 그리고 있었는데 움츠러든 지도 못 알아챘었다"라고. 때로 어떤 말은 날카로운 진심이 담겨 사람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리는 것 같다. 그런 말은 멈추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북클럽 분들은 살면서 어떤 한마디를 들었을까? 어떤 이야기로 다시 살아보고 싶은 용기를 얻었을까? 토론 주제로 올리고 각자 생각해 보고 나누기로 했다.
50대 여성분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을 모두 키우고 남편분의 사업을 돕고 있는 중년 여성분이었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이 드는 분. 30대 초반, 결혼하고 아이가 유치원 다니던 즈음, 2여 년간 친정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했다. 연이어 오빠들의 사업이 실패하고, 급기야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바람 잘 날 없는 날들이었다고.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파도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는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고. 무엇보다 그녀를 절망하게 했던 것은 마음으로 크게 의지했던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때 그녀는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고 했다. 슬픔에 압도당해서 매일 울기만 했다고. 챙겨야 하는 가족들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슬픔으로 흘러가던 중에, 동네 언니가 집에 찾아왔다고. 그 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너, 이 정도도 안 겪고 어른이 되려고 했어?"
".... "
위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아무리 슬퍼도 너는 챙겨야 하는 가족이 있어. 부모님이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생각 안 해 봤어? 이 정도도 안 떠올려봤어? 슬퍼도 할 일 다 하고 슬퍼해. 아이들 다 챙기고 밥도 하고 그러고 나서 슬프면 그때 울어."
얼마나 야속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그런데 또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른다고.
언니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나중에 애들이 너 죽었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자기 일상 내팽개치고 울고만 있으면 좋겠어?"
그 언니 덕분에 기어이 힘을 내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와서 엄마, 오늘도 또 울었어? 엄마 오늘도 슬퍼?라고 물어보았을 때, '응, 엄마는 할머니가 죽어서 슬퍼. 그런데 엄마 이제 힘낼게' 그렇게 말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고.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가며 몇 번씩 눈물이 났다고.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이렇게 속삭였다고. "엄마, 나 우는 거는 나중에 할게. 엄마 나 잘 살게. 그게 엄마가 원하는 거지? 지금 내가 여기서 잘 살아가는 거"
두렵고 무섭고 막막한 터널을 건너다 어떤 때는 주저앉아 울고만 싶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눈물 나게 벅찰 때가 있다. 그런 시간을 지나오며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것일까. 쓴소리였지만 그 말이 참 아팠지만 힘든 상황일 때, 내가 더 용감해져야 할 때, 그 언니의 말을 떠올렸다고 했다. 사는 동안 그 말 한마디에 의지해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고. 그때 나를 일으켜줘서 고마웠다고 꼭 전하고 싶다고 하셨다.
누군가에게는 아플 수 있는 말. "너, 이 정도도 안 겪고 어른이 되려고 했어?"
팔만 사천 가지의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 삶에 나타난다는 문수보살이 떠오른다. 따뜻한 말과 포옹만이 사랑은 아니다. 때로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스스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나 가능하니 따스한 포옹보다 훨씬 값지고 깊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알아보는 것은 받는 사람의 몫이다.
진정한 지혜는 지금 그 사람에게 꼭 맞는 사랑을 건네는 것. 공감이 필요한 때에는 '그랬구나, 네가 그럴만해서 그랬겠지'라는 마음으로 아무 말 없이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때로는 당장 듣기에 좋은 말이 아니더라도 그를 일으켜 세우는 따끔한 말을 전하는 사람이고 싶다. 어떤 힘든 일이든 잘 이겨낼 수 있는 단단하고 건강한 사람이라고 믿어주면서.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랑의 마음은 호주머니에 숨겨둔 채로. 그녀에게 동네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