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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Dec 04. 2023

60년간 숙성된 사랑



건축현장을 지날 때면, 건물의 철골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 굵기와 높이, 질감,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굳건함'이 느껴진다. '철골'이란 굳세게 생긴 골격, 철재로 된 건축물의 뼈대를 뜻한다. 잘 알고 있는 뜻과 달리, '몸이 바싹 야위어 뼈만 남은 상태, 뼈에 사무침'이라는 뜻도 있다. 전자는 쇠를 뜻하는 '쇠 철'을 쓰는 반면, 후자는 '통하다, 관통하다, 꿰뚫다'를 의미하는 '통할 철'을 사용한다. 같은 단어가 이렇게 상반되게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 삶의 부차적인 것들을 걷어내면 우리 안에도 뼈대가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깊숙이 몸을 숨기고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것. 뼈대가 무너지면 건물이 주저앉는다. 삶이 무너진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즈음 안에 나를 받치고 있는 철골무엇인지 들여다볼 일이다.



12월 첫 주말, 좋은 기회가 되어 이해인 수녀님을 뵙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 알았다. 유년시절 성당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그녀의 시를 읽고 낭독하면서, 저 아름다운 분이 내 안에 은은하게 살아계셨구나. 매일 아침 그녀의 시를 필사하시는 엄마 안에도 그녀가 든든하게 살아계시는구나. 내년이면 수도생활 60년이 되신다고 하신다. 책은 50권 내셨다고. 인세는 1원도 개인이  취하지 않고 공동체의 것으로 돌려준다 하신다.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듣고도 믿기지 않는 무욕의 마음이었다. 그녀가 꾸리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공간 '민들레의 영토'를 둘러보며, 그녀가 자유를 꿈꾸는 민들레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민들레는 낮은 땅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는 듯싶지만, 매 순간 가능한 멀리까지 가닿고자 하는 '자유'를 꿈꾼다. 그 꿈은 간절하여 늘 이루어지는데, 꽃이 지면 하얀 씨에는 날개가 돋쳐서 봄바람이 후- 불면 하늘하늘 세상 곳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해인이라는 한송이 민들레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가슴에 사랑을, 용기를, 희망을, 위로를 전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뭉클해진다.


그녀의 보물상자 같은 편지 창고에는 60년 동안 받은 편지가 가득했다. 그 안에는 세계 곳곳에서 '이해'이라는 태양을 향해 해바라기처럼 보내진 편지들이 있었다. 세상을 향해 쓰는 시 편지에 끝없이 화답받는 행복한 사람. 그녀는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러 이 생에 오신 것이 아닐까. 다양한 사연을 품은 편지들 중 인상적이었던 건, 교도소에서 온 편지 상자였다. 이름이 잘 알려진 한 재소자가 보낸 편지가 줄잡아 백 장 넘게 엮어져 있었다. '글씨 좀 봐. 내용도 얼마나 논리에 맞추어서 잘 썼는지. 사랑을 못 받아서 아픈 사람이지...' 그를 향한 수녀님은 영락없는 이모님이었다. 해인이모님, 이라 칭하며 써 내려간 그의 글씨가 너무 가지런하고 정갈해서 나는 내심 놀랐다. 얼마 전에는 배우 이영애도 찾아와서 만났지, 하신다. 재소자와 배우 이영애와 그날 함께 했던 우리들 모두 참새줄에 나란히 앉은 참새들처럼 수녀님 앞에서는 똑같이 어여쁘고 사랑을 주고 싶은 존재들일뿐. '위아래 없는 평등'을 말이 아닌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사랑이구나, 그녀에게서 평등을 가슴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가 그 마음을 거저 얻었다고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긴 세월 뼈에 사무치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이겨내고 세상을 껴안으며 얻은 귀한 마음이리라.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사랑, 60년간 숙성된 사랑의 마음이리라.


모든 인간의 삶의 뼈대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각자가 자신을 이루고 있는 사랑의 철골을 더 단단하게 품어 안았으면 좋겠다. 내 안에 존재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감사한 만큼, 그들이 사무치게 그리운 만큼 더 깊이 사랑하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선종에는 '세계는 하나, 세계는 한 송이 꽃과 그 열매'라는 뜻의 '세계일화'라는 선어가 있다. 수녀님이 한송이 민들레로 거대한 세상을 뜨겁게 품고 살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꽃과 꽃이 어우러진 세상이라는 꽃밭에서 자신만의 향기를 꽃피우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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