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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Jan 24. 2024

나는 그걸 해낼 깜냥이 아니었어

2년 전 대기업을 퇴사하신 40대 중반 여성분이었습니다. 지금은 뷰티미용학과에 입학해서 대학생활을 하고 계신 밝고 긍정적인 분. 새로 배운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눈을 반짝이는 분. 평소와 달리 오늘은 시무룩한 느낌이 들어서 무슨 일이 있으신가, 궁금했지요. 

“긍정의 아이콘 H님, 오늘은 왜 표정이 어두워 보이실까요.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아, 아니에요. 그냥... 전 직장동료들 만나고 오면 약간 기분이 다운이 돼요. 어제저녁에 선후배들을 만났거든요.”

“아, 그러셨구나. 그런 마음이 드실 수 있지요. 전 직장분들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그게.. 뭐랄까. 아쉬움 같기도 하고, 미련 같기도 하고요. 내가 끝까지 해 내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분명 스스로 결정해서 퇴사했고 지금은 제가 원하는 거 배우면서 즐겁게 살고 있는데도 마음에 찝찝하게 남아있는 게 있어요. 끝까지 버텨서 부장까지 해볼걸 그랬나? 그런 마음이랄까요.”

“아, 그러시구나.. 당연히 그런 마음이 드실 수 있지요.”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살아가는데 동료들 만나면 그 마음이 슬쩍 들고일어나는 느낌이에요. 제가 외면하고 덮어두었던 거죠. 그때 내가 퇴사한 건 육아 때문이야. 지난번 말씀 드린 것처럼 코로나 때 정말 힘들었거든요. 남편은 지방으로 파견 나가고 아이들은 학교 못 가고. 아무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그땐 퇴사밖에 답이 없는 상황이라서 누구도 나한테 뭐라고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제 직장동료들 만나고 돌아오면서, 그게 아니었다는 걸 뼈저리게 직면하게 되었어요. 스스로는 속일 수 없는 자기만 아는 마음이 있잖아요. 사실은 제 능력이 부족했어요.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회사 탓하고 상황 탓하고 그랬던 거였구나. 사람들한테 그렇게 보이기 싫어서 변명하며 살았구나. 그래서 늘 찝찝했구나 알아졌어요.”


“아, 그러셨구나. 어떤 부분에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셨어요? 평가도 좋은 편이었고 팀장급 승진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그게요.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회사가 가는 방향이 저와 맞지가 않았어요. 위로 올라갈수록 특히 팀장급이 되면 회사에서 원하는 리더의 역할이 있는데 그게 참 씁쓸하거든요. 회사 안에서는 위에서 하라는 데로 찍소리도 못하고 네-하면서 외부 업체에 나가서는 권위를 세우면서 갑질을 해야 하거든요. 이번달 매출 밀어내,라고 말하면 가짜로 매출 만들고... 그렇게 업체들 쪼아서 성과를 내야 하고요. 그게 처음이 어렵지 점점 익숙해진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걸 너무 배우고 싶지 않았고요. 그걸 배워서 하고 있는 선배가 너무 괴로워 보이는 거예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선배인데 그 모습이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거죠. 그런데 점점 익숙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 좀... 무섭기도 하더라고요. 나도 저렇게 될까? 저는 그렇게 해낼 자신이 없었어요. 실무능력이 뛰어난 것과 관리능력은 다르지 않을까. 그냥 보는 것만으로 겁을 먹은 거죠.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해 버린 건 아닌가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러시구나... 살짝 화제를 돌려서 지금 배우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어떤 부분이 재미있으세요?”

“원래부터 뷰티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어릴 때는 메이크업이나 패션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고요. 그런데 그런 쪽으로 전공을 하진 못했고요. 저 경제학과 나온 건 아시죠? 당시에는 취업이 잘 되는 전공으로 가야 했어요. 원래부터 배우고 싶었던 쪽이라서 전공 수업도 재밌고요, 실습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어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공부 마치고 에스테틱 숍 오픈할 상상을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요.”

“지금 배우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눈에서 빛이 나오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회사생활과 지금 하시는 공부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다른 점이 보이네요. 회사에서의 생활은 수입이 예측되었지만 지금 생활은 미래가 그려진다는 점이 아닐까 해요. 회사 다닐 때의 그림과는 다른 그림이지만 지금의 그림이 더 가슴 뛰는 그림이신 것 같아요. 제 추측이 맞나요?”

“맞아요. 물론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불안감이 있긴 하지만 내 성장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무척 설레요. 대학생들이랑 함께 해서 더 그런 느낌인 듯도 하고요.”


“그러시구나. 저도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 지점에서 포기한 게 아닌가, 싶은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누구나 후회되고 서성이는 지점이 있잖아요. 어느 날 저의 스승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포기했다고 생각할 뿐이지만 우리는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는 존재라고요. '포기'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라고요. '포기'란 '나에게 가장 가치로운 것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고요. 그 말씀이 제게 굉장히 큰 울림이 있었어요. 곰곰 생각해 보니 정말 저는 어떤 상황에서든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했더라고요. 예를 들어, 등산을 할 때 처음에는 정상까지 오르는 게 목표일 수 있지요. 중간에 몸이 아프다면 내 몸상태를 느껴보고 이 상태로 더 올라가면 안 되겠구나, 느껴진다면 내려가는 게 맞잖아요. 어떤 사람은 넌 왜 정상까지 안 갔어? 하면서 포기한 걸로 볼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때 그 순간에 나한테 가장 가치로운 것은 내 몸이었으니까, 내 몸을 보호하는 것이 정상까지 가는 것보다 더 가치롭다고 생각한 거니까 다른 사람 의견에 휘둘릴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그렇게 관점 전환을 하고 나니, 더 이상 과거의 장면에 이전만큼 연연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와... 그런 관점으로 볼 수도 있군요. 저 같은 경우는 그때 내가 그 회사에 임원진까지 가는 것이 가치로운 것이 아니었네요. 나랑 결이 맞지 않는 곳에서 점을 찍고, 내가 진짜 원하는 걸 배우고 성장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저한테 가치로운 거였네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선택을 한 거네요.”

“맞아요. 그런 관점으로 바라보면 뒤를 안 보게 돼요. 내가 향하기로 한 곳으로 나아가게 되죠. 그때 그 순간 내가 선택했다. 딱 인정하게 되는 거예요.”


“얼마 전에 어떤 회사 부사장님이 사장 진급을 앞두고 그만두면서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뭔가 알 수 없는 가슴에 뜨끔함과 울림이 있었거든요. 그때는 이게 뭐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지금 나누면서 알아졌어요. 왜 사장 진급을 포기하고 퇴사하게 됐냐는 질문에, 그분이 이렇게 답변하시더라고요. 본인은 그걸 해낼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요. 온라인으로 다변화된 세상에서 지금의 자기 감각으로 기업체를 이끌고 간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요.”

“와... 깔끔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멋지네요! 저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 중에 현재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 모습을 인정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거든요. 저렇게 스스로 인정하고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진짜 어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깔끔하게 인정해야 미세하게 남아있는 변명거리나 합리화하려는 생각을 잠재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는 거야.라는 관점으로 원함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요.”

“맞아요. 저 이제 깨끗하게 점찍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나는 팀장까지 해낼 수 있는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게 내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야. 그 회사에서의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지금 나에게 가치로운 것을 선택해서 나아가고 있어!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고 힘이 되네요. 정말 놀라운 관점 변화네요!” 


H님과의 대화를 통해 저 역시 과거의 어느 지점에서 서성이고 후회하고 눈물짓던 저를 잘 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포기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때 내게 가장 가치로운 것을 선택했을 뿐이지요. 때로 그 선택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부끄럽고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진짜 내 원함이 있었기에 '내가' 선택했던 것이지요. 내가 그만두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이 더 소중해서요. 내 가족과의 시간이 더 중요해서요. 불안하고 두렵지만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요. 진짜 내 삶을 신명 나게 살아보고 싶어서요. 


내가 선택했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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