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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편,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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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중효 Aug 31. 2022

영(0)과 육(6) 사이

지옥 (2021)


영(0)

  인간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진행된 한 실험에 기원을 둔다. 실험의 개요는 이렇다. 우선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의 몸무게를 측정한다. 그리고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저울의 눈금 변화를 관찰하여 전 후의 차이를 정확하게 기록한다. 만일 여기서 차이가 발생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 영혼의 무게인 것이다. 이 실험에 따르면, 놀랍게도 숨을 거둔 후 환자의 몸무게가 약 21그램 줄어들었다고 한다. 21그램의 무게를 가진 영혼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하지만 이 실험은 기록으로 남았을 뿐, 같은 조건의 다른 실험에선 재연되지 못하였다. 많은 이들에게 낭만적인 시도로 기억되었지만, 이 실험은 결국 과학적인 신빙성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실험 결과의 신빙성을 차치하더라도, 나는 이 실험으로 영혼의 유무를 증명할 순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각 문화권마다 영혼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공통적인 영혼의 특징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존재 유무를 떠나, 결국 영혼의 무게는 반드시 영(0) 그램이 되어야만 한다.


 이렇듯 영혼의 비 물질성은 일종의 불문율이다. <신과 함께>의 저승 차사들이 그러하듯,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은 영적인 존재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지옥>의 첫 장면은 이러한 불문율을 파괴하며 시작된다. 지옥의 사자들은 별안간 대낮부터 대로변을 부수며 등장한다.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사자들은 주먹으로 목표물을 두들겨 패고 그 자리에서 심판을 내린다. 물질성을 지닌 영혼. 존재 자체가 역설인 이들의 등장은 이미 상징계의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실재(real)의 출현'이다. 연이어 비치는 경찰서의 풍경은 차라리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그들은 이를 살인사건으로 규정하고 범인을 잡고자 수사에 착수한다. 이들은 예기치 못하게 발생한 구조의 결함을 어떻게든 기존의 방식으로 덮어보려 애를 쓴다. 공권력은 결국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형사들은 사이비 교주의 집회를 기웃거리게 된다.  


 새 진리회의 창지자 정진수(유아인)는 우연을 필연으로 위장시키는 인물이다. 라캉은 우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했는데, 하나는 도덕적 행동을 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그런 우연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실제 세계에서 벌어지는 우연한 사건들을 가리킨다. 정진수는 어린 시절 '20년 뒤 너는 지옥에 간다'라는 이른바 천사의 고지를 받고 난 후, 자신이 죄를 지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는 결국 '죄지은 자'가 고지를 받는다는 법칙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두려움을 느끼도록) 새 진리회를 세워 이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아무런 규칙 없이 벌어지는 초자연(supernatural)에 그는 도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권선징악의 복음'에 쉽게 현혹된다. 오이디푸스의 자기 실행적 예언처럼, 결국 그는 '지옥에 가기 위해' 죄를 짓는다. 그제야 그의 죽음은 필연(nesessity)이 되는 것이다.


  화살촉은 정진수의 복음을 전달하는 사도(apostle)에 가깝다. 유럽 전역을 누비며 맨발로 복음을 전했던 12 사도와 달리, 화살촉의 사도는 한 명의 유튜버가 실시간으로 수백만 명에게 말씀을 전달한다. 화살촉을 선동하는 유튜버 이동욱(김도윤)의 방송용 분장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방송에서 짐승의 해골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원시부족을 연상케 하는 분장을 한다. 이는 현대판 토테미즘(totemism)으로 보인다. 샤먼이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동물 정령과 동일시되는 것처럼, 이동욱은 분장을 함으로써 새 진리교와 화살촉 사이 매개자의 지위를 얻게 된다. 그런 그가 고지를 받는 장면은 특별히 인상적이다. 어느 날 그는 1인 방송을 마치고 자신의 방문 앞을 나서다가 고지를 내리는 천사와 마주친다. 그는 일순간 충격에 휩싸여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모든 힘을 다해 혐오해 온 오물 덩어리, 즉 지옥에 가야 할 죄인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된다.


 두 아이의 엄마 박정자(김신록)는 고지를 받은 후, 자신의 시연을 생중계하기로 결정한다. 이른바 시연은 지옥의 사자들에게 심판을 받는 행위를 뜻하는데, 화살촉은 정진수의 말을 따라, 고지받은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시연을 기다리는 이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하고, 이들을 조리돌림 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시연을 앞에 둔 이들은 표적이 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 정진수는 새 진리회의 세를 넓히려는 목적으로 박정자에게 생중계를 제안하고, 큰 금액을 받기로 한 박정자는 두 아이의 미래를 위해 제안을 수락한다. 변호사 민혜진(김현주)은 박정자의 시연 생중계를 도와주는 인물이다. 민혜진은 박정자의 두 아이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도록 도움을 주고, 박정자가 합의된 금액을 무사히 전달받을 수 있도록 돕는 존재이지만, 시연 생중계를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본질적으로 정진수와 다르지 않다. 시연 당일의 풍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흰 가면을 쓴 후원자들이 가장 잘 보이는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현수막을 든 새 진리교 추종자들이 골목을 채운다. 쨍쨍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카운트가 시작된다. 박정자의 시연은 일종의 분기점이다. 이를 전후하여 극의 모든 것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연이 생중계되고, 충격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그녀의 숭고한 희생은 기어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진희정(이레)은 정진수의 도움을 받아 십수 년 전 자신의 엄마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어 살해한다. 가해자를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인상 깊다. 결코 기쁘지 않지만 만족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죽음의 충동(thanathos) 그 자체이다. 형사 진경훈(양익준)은 그의 딸 진희정을 되찾기 위해 정진수의 고시원으로 쳐들어간다. 그러자 새 진리회의 수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구타하기 시작한다. 이때 진경훈의 핸드폰 화면에 정진수의 이름이 뜬다. 정진수에게 영상통화가 걸려 온 것이다. 진경훈의 핸드폰 화면에 정진수의 얼굴이 등장하고 진경훈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높이 올린다. 정진수의 추종자들은 곧바로 구타를 멈추고 핸드폰 화면을 우러러본다.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정진수의 말이 추종자들에게 퍼져나간다. 페이스타임을 통해 말씀을 전파하는 신흥종교라니, 이러한 모습은 관객들에게 낯설고 기묘한 장면으로 각인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진경훈은 정진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가까스로 군중들 무리에서 탈출한 진경훈은 정진수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어두컴컴한 폐건물에서 시연을 10분 남짓 앞둔 채 정진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배우 유아인의 독백 연기로 이끌어가는 이 장면은 마치 일인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0년 전 고지를 받은 사건, 죄를 피하려고 발버둥 친 시간, 새 진리회를 세운 이유 등 정진수는 진경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다. 자신의 시연 장면을 촬영하여 세상에 알리고 새 진리회의 폭주를 막을 것인지 아니면 이미 범죄를 저지른 딸을 데리고 조용히 살아갈 것인지. 클로즈 업된 진경훈의 얼굴 표정에서 관객들은 어쩌면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그는 결국 살기 위해 정의를 외면한다. 그의 슬픈 얼굴 깊숙한 곳에는 생존에 대한 충동(eros)이 요동치고 있다.  


육(6)     

  숫자 여섯(six)은 기독교 문화에서 불길한 숫자이다. 특히 6이 세 번 반복된다면, 그것은 곧바로 악을 상징하는 단어가 된다. 우연인지 국어에서 육이라는 발음은 숫자 여섯이라는 뜻과 함께, 육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과한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육(肉)에서 오는 것을 악한 것이라 여기는 기독교의 교리를 생각한다면, 두 의미가 서로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가톨릭의 미사 중에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모시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모순적으로 보인다. 성체성사의 의미는 영적으로 완전한 존재의 육화(肉化) 즉, 신의 아들이 한점 고깃덩어리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물질성을 지닌 영혼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지옥의 사자들처럼 아기 예수 역시 존재 자체로 이미 역설이다. 성과 속을 칼같이 구분하는 이분법의 종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기독교 교리 안에서도 이러한 일치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의 후반부 에피소드는 한 아기의 탄생으로 시작된다. 태어나자마자 고지를 받은 이 아기의 존재는 그 자체로 문제를 발생시킨다. 갓 태어난 아기는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상징계로 포섭된 초자연에 다시 구멍을 내는 존재인 것이다. 완결된 구조에 심각한 결함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이 아기는 어쩌면 아기 예수의 은유(metaphor)인지 모른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annunciation)를 받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 요셉 역시 천사의 말에 순응하며 예루살렘으로 떠난다. 그 당시 유다인의 왕이었던 헤로데는 한 아기가 자신의 왕위를 가로챌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모두 학살한다. 다시 <지옥>으로 돌아와 보자. 천사의 고지를 받은 아기를 둘러싸고 이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아기의 부모는 고지 사실을 알고 난 후 각자 다른 곳에 도움을 청한다. 우선 아빠 배영재(박정민)는 새 진리회에 저항하는 조직 소도를 찾는다. 하지만 소도를 이끌고 있는 민혜진은 뜻밖에도 아기의 시연을 생중계하자고 제안한다. 그녀는 아기가 새 진리회의 교리가 틀렸음을 증명할 살아있는 증거가 될 것이라 말한다. 배영재는 단칼에 거절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 사이 엄마 송소현(원진아)은 새 진리회를 찾아가 납득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한다. 2대 의장 김정칠(이동희) 체제의 새 진리회는 지옥사자들에 대한 해석을 독점함으로써 이미 거대 권력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고지를 받은 이들을 죄인이라는 명목으로 색출하고 방송권력을 장악하여 시연을 생중계한다. 김정칠은 아기의 존재가 그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아기의 시연 생중계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유지 사제(류경수)는 새 진리회의 행동대장 격이다. 직접적으로 법에 저촉되는 행위는 전국구 단위로 확대된 화살촉 조직원들이 수행한다. 김정칠-유지 사제-화살촉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언제든 쉽게 '꼬리 자르기'가 가능하도록 표면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처음에 비해 화살촉의 범죄 수위는 점점 높아진다. 눈에 띄는 점은 이들의 폭력이 유난히 노인들에게 가혹하다는 점이다. 지병을 앓고 시한부로 삶을 이어가던 민혜진의 어머니는 화살촉에 의해 묻지 마 폭행으로 죽임을 당한다. 또한 새 진리회를 향해 직언을 한 백발의 노인 역시 그 자리에서 유지 사제에게 폭행을 당해 죽는다. 노인들의 최후와 아기의 탄생이라는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고지를 받은 아기의 비극적인 운명은 더욱 부각된다.   


 아기의 시연을 둘러싼 싸움은 점점 극으로 치닫는다. 화살촉을 선동하던 유튜버 이동욱은 자신의 채널을 통해 아기의 시연 생중계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지만, 자신의 시연이 가까워오자 변심하게 된다. 그는 새 진리회에게 아기의 시연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알려주고 유지 사제는 생중계를 막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한다. 그러나 자연의 순리처럼 정확한 시간에 시연은 시작된다. 그 순간 다시 한번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 벌어진다. 아기의 부모들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감싸 안았고, 아기는 고지를 받은 이들 중에 최초로 생존하게 된다. 아기의 존재는 설명이 가능해진 초자연에 다시 설명 불가능한 빈틈을 만든다.


사이

  <지옥>의 영어 제목인 <hellboud>는 '지옥'을 뜻하는 hell과 '~를 향하는'이라는 뜻의 bound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이다. 굳이 국어로 직역하자면 '지옥행'을 뜻한다. 이런 작명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연상호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의 공통된 키워드는 '사이'이다. 이 공간적 의미의 사이를 보여주었다면, 은 시간적 의미의 사이를 보여준다. <부산행>에서 목적지 '부산'은 좀비 바이러스로 뒤덮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안전지대를 의미한다. 아직은 목적지가 있고 해 볼 만한 도전이란 의미에서 의 사이는 희망적이다. 그에 비해 <지옥>의 사이는 어떠한가. <지옥>은 마치 지상의 공간이 어떻게 실시간으로 지옥이 되어가는지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곳에는 규칙도 희망도 없으며, 다만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신의 '인간 뽑기'가 있을 뿐이다. '부산'을 향한 탈출기(exodus)에서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으로 연상호의 암울한 유니버스는 과감하게 흘러간다.


 이제 사이의 의미를 확장해보자. 사이라는 단어는 둘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성과 속 ‘사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지옥의 사자들과 고지받은 아기, 이 두 존재가 모두 극 중에서 CG로 표현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촬영장 안에 여타 피사체들과 달리 CG의 무게는 0그램이다. 이들은 한 마디로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공백(void)이다. 이러한 공백은 영화 아닌 현실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 코로나 시대에 공개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의학과 의료체계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전염병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옥>은 어쩌면 조금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태도를 일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 임중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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