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30년간의 회사 생활이 완전히 끝났다.
아직은 좀 어리둥절하다. 이제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낯설고 어색하다. 그래도 이런 감각도 시간이 지나면 곧 익숙해지겠지.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앞으로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입사할 때 적어두었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실현해 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맨 위에 있던 꿈은 ‘책을 쓰는 것’이었다. 30년 동안 마음속에만 품고 미뤄두었던 꿈이다. 그동안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는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아마도 영영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무엇을 써야 할지가 막막했다.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했지만, 결국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한 권의 책으로 엮을만한 내용이 내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 지난 30년간의 회사 생활을 쓰기로 했다. 반도체 회사에서 여성 엔지니어로 살아남은 30년의 시간에 대해 말이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나서도 의심은 금세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과연 누가 나처럼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줄까. 임원도 아니고, 대단한 성공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30년을 버텼다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인데.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이 글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다. 독자에게 읽지 않을 자유가 있다면, 나에게는 쓸 자유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회사를 나오면서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올해 안에 책을 쓰겠다”라고 일부러 크게 말했다. 그래야만 실제로 쓰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공개적 선언(Public Commitment)’ 전략이었다. 공개적 선언이란, 자신의 목표나 계획을 주변 사람들에게 분명히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말로 꺼내는 행위 자체가 실행을 촉진하는 심리적 장치가 된다.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을 뒤집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고,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목표를 공개할수록 스스로를 물러설 수 없는 자리로 밀어 넣게 된다. 혼자만 간직한 목표는 어느 날 조용히 접을 수 있지만, 남들에게 말해둔 목표는 쉽게 포기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선 지난 30년의 회사 생활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브런치북 형태로 써보기로 했다. 그리고 첫 번째 브런치북의 주제는 이것이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품어왔던 열등감이, 삼성에서 보낸 30년 동안 어떻게 사라졌는가.’
나는 아들 하나에 딸 넷인 집안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엄마의 일방적인 아들 사랑을 보며 자랐고, 그에 대한 반항심은 곧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과 열등감으로 이어졌다. 그 감정은 꽤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난 30년 동안 내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이 글에서는 그 과정을 기록해보려 한다.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여자’라는 자각을 내려놓고 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 시간들에 대해. 그렇게 조금씩 변화해 온 30년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