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 년 전 2월 22일 저녁 6시쯤.
엄마는 당신의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지방 소도시의 작은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나를 낳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날은 병원장이시던 작은 외할아버지의 생신이었다. 때문에 엄마의 사촌들이 대거 그 병원에 모였다. 사촌만 대여섯 명이고 그들이 모두 결혼을 한 상태였고 얘들도 데려왔을 테니 꽤 많은 무리가 병원 꼭대기층의 병원장 집에 모여들었을게다. 그리고, 그들은 엄마가 누워있던 병실로 모여들었다.
"이 시간에 아들이 태어나면 사주가 꽤 괜찮겠는데?"
누군가가 어떤 근거인지 모르지만 나름의 사주론을 펼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 말에 방안의 열기는 더 고조되었다. 그러나, 딸인 내가 태어난 순간, 그 많은 무리는 썰물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도 없더라"
엄마는 이 말을 웃으며 내게 하셨지만, 듣는 나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아들이었다면 그들의 환호성에 부합하고 그 밤의 열기가 한껏 고조될 수 있었겠지만, 딸이었던 나는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존재였다.
게다가 그 실망은 병실밖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오빠를 낳기 전, 엄마는 태몽을 꾸셨다. 뱀 두 마리가 엄마에게 다가오다가 한 마리가 먼저 왔고, 한 마리는 다음에 오겠다면서 돌아갔다. 이 꿈을 꾸고 엄마는 오빠를 낳았고, 이어 다시 임신을 하시고는 당연히 이번에도 아들일 것이라 믿으셨던 것이다.
자라는 내내 엄마는 딸들에게 와는 확연한 온도차로 아들 하나인 오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드러냈다. 사과가 두 개 있으면 아들에게 하나, 딸들에게 하나씩 줘야 공평한 거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물론 딸들의 거센 반발에 실제로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사과 하나쯤은 오빠에게 더 건네졌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맹목적이었고, 오빠가 잘못해도 크게 혼내지도 못하고 뭔가 모를 영원한 '을'인듯한 모습이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나는 오빠보다 성적이 좋았다. 그러나, 엄마에게 성적표를 내밀면 돌아오는 말은 늘 같았다.
“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그 말은 내 귀에 이렇게 들렸다.
"너는 여자라서 공부 잘해도 소용없어"
나는 같은 여자면서 아들인 오빠만 감싸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엄마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엄마 자신도 여자로 태어나 겪었던 차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름 지방 유지셨던 엄마 할아버지의 재력 덕분에 엄마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총명하고 손재주가 좋아 초중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고 집안의 가세는 급격하게 어려워졌다. 결국 엄마는 대학 진학을 못하고 교육 기회를 남자 형제들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똑똑해 봐야 결국 여자라는 이유로 주저앉아야 했던 경험. 그것이 엄마에게 '여자는 소용없다'는 패배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 믿음은 딸에게 기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거는 태도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엄마 개인의 단순한 편애라기보다, 그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이 공유했던 서글픈 생존의 논리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