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말했다. 공부가 미치도록 하기 싫었던 젊은 시절,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가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부터 소 도축하는 일까지 고된 일을 해 보고 나서 공부가 하고 싶어 졌다고.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남은 학년을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마칠 수 있었다고.
내가 말했다. 나도 비슷한 시기가 온 것 같다고. 일이 미치도록 하기가 싫고 떠나고 싶다고. 아무도 모르는 작은 지방 도시로 이사를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고 싶기도 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남미, 남극, 캐나다, 러시아 등지를 거치며 세계여행을 하고 싶기도 하고, 국내라도 한 바퀴를 걸어서 돌고 싶기도 하다고.
친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기는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젊을 때는 미지에 대한 두근거림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이제는 가슴 뛰는 일이 없다고. 미국이고, 유럽이고 가는 것도 별로 감흥이 없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지루하고 시간이 너무 안 가서 못 하겠다고. 왜 고생해서 길을 걸어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나도 동의했다. 이제는 그런 일을 하면서 느낄 감흥이 없어진 나이가 되었다는 것에 동의했다. 일이 미치도록 하기 싫지만, 너무도 도피를 하고 싶지만, 이제는 워킹 홀리데이 같은 것도 할 나이가 지났고, 힘든 일을 할 의욕도 없는 나이가 되고 만 것이다. 이를 어찌할까.
친구가 말했다. 적당히 다닐 직장이 있고, 주말에 편하게 쉬는 삶에 너무 만족한다고.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로는 더더욱 해방감을 느끼고, 삶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여행을 가는 것도 귀찮고, 굳이 갈 이유도 모르겠다고.
나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구하면서 이력서를 내는 상상을 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력서에 교수라고 써 놓으면 얼마나 웃길까.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사장이 궁금해서 이유를 묻지 않을까. 왜 이 경력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냐고.
나는 내가 일을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남미, 남극, 캐나다, 러시아를 거쳐, 유럽의 각국을 돌다가 다시 중동, 아시아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남미에서 사고를 당해 죽는 상상을 했다. 혹은 배낭을 메고, 배낭에 여분의 신발 한 켤레를 주렁주렁 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더 늙기 전에 이런 일들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말에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늙기 전에 왜 그런 일을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자기 삶에 안분지족 할 수 있는 친구가 부러웠다.
* 메인 사진 : 나의 산티아고(I'm Off Then, 2016)라는 독일의 코미디 영화로 인기 코미디언인 주인공이 공연 중 쓰러지면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되면서 생기는 일들을 보여준다.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조금은 달래 주었던 영화다. 생각보다 재밌게 봤고, 나는 주인공 하페와 스텔라가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 의외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직접 보시기를 추천드림) 산티아고 순례길을 간들 뾰족한 깨달음이나 변화가 찾아올까 싶지만 실제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르리라고 생각된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걷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