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후회하기엔 아직 너무 이르잖아요.
초등학교 입학 전에 미리 시켜두지 않으면 후회한다는 사교육으로 손꼽히는 것이 무엇인줄 아는가? 바로 줄넘기다. 뭐? 줄넘기? 줄넘기를 학원에서 배운다고? 그냥 줄만 돌리면 되는 걸 학원까지 가서 배운다고? 사교육에 관해서는 무지렁이였던 나는 코웃음을 쳤더랬다.
예비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몇 번이고 줄넘기 학원을 보내달라고 졸라댔지만, 그런 건 그냥 하다 보면 되는 거라고 굳이 무슨 학원까지 가냐고 몇 번을 만류했었다. 다행스럽게도 유치원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과 일주일에 2번씩 줄넘기를 할 테니 줄넘기를 하나씩 사서 보내라고 하셨다.
그때는 몰랐다. 연속으로 줄을 넘는다는 것이 어린아이에게 얼마나 어려운 과제였는지를. 그리고 줄넘기의 세계는 그냥 단순히 줄만 넘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치원에서 1년째 계속되어 온 줄넘기였다. 태권도 학원이나, 줄넘기 학원을 다닌 아이들은 줄넘기를 곧 잘했지만, J는 겨우 한 번 줄을 넘기는 정도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저절로 잘하게 될 거라 생각한 나의 바람과는 달리, 여름방학 이후 J는 줄넘기를 잘하는 아이들과 격차가 더 벌어져 있었다. 유치원 담임 선생님도 아이들 별 실력차가 심해서 이제는 안 되겠다 생각하셨는지 세 그룹으로 나누어서 줄넘기 연습을 진행한다고 하셨다. J는 당연히 가장 못하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 J와 여자아이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연속해서 줄넘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유치원에서 주 2회씩 연습하는 것에 더해 가끔 아파트 실내 체육관에 가서 아빠랑 짧게나마 줄넘기 연습을 하고 왔다. 하지만 별 차도는 없었다.
J가 1년 가까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유치원 어플에 올라온 동영상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장기자랑시간에 최신 가요에 맞춰 한발 줄넘기, X자 줄넘기 등 차원이 다른 줄넘기를 선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하다 보면 J도 잘할 거야.”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이쯤 되자 줄넘기 학원을 보내달라던 J의 요구를 어물쩍 무시해 버렸던 게 못내 후회가 됐다. 남들 다 하는 걸 우리 아들만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언젠가는 다 하게 될 걸 뭐 하러 사교육을 하냐던 여유는 온대 간데 없어지고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제야 뒤늦게 여기저기 검색을 해 보니, 요즘 초등학교는 줄넘기가 필수라는 맘카페의 글이 가장 먼저 보였고, 줄넘기 인증제(급수제)를 도입해 줄넘기를 수행평가 항목으로 지정하거나 학년별로 줄넘기를 몇 회 통과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주는 학교들이 있다는 신문기사도 눈에 띄었다. “줄넘기 학원을 보내고 나니 그렇게 안되던 줄넘기가 2주 만에 잘 되더라, J엄마 그렇게 언젠가는 되겠지 하고 손 놓고 있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보내.” 라던 아이 친구 엄마의 말도 떠올랐다. 초등학생에게 자존감의 원천이 곧 줄넘기라나 뭐라나. 아뿔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줄넘기학원의 무료 샘플수업이라도 한 번 받아 보기로 했다. 수업 날,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제각각 자기의 줄넘기 기술을 뽐내는 가운데, 한 번을 겨우 넘을까 말까 한 J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유치원에서도 뒤처지는 것이 못내 신경 쓰였던 J는 줄넘기 학원에서조차 자신만 줄넘기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당황했는지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줄을 넘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영 안쓰러웠다.
‘진작 줄넘기학원에 보냈으면 다른 아이들과 비슷하게는 할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너를 위축되게 한 걸까. 남들이 많이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그걸 안보내서. 커피 몇 잔 안 마시면 그만이었을 걸.’ 하지만 이제와 줄넘기학원에 등록하는 건 망설여졌다. 체력을 기르는 목적이라면 다른 학원도 많은데, 네가 원할 때 처음부터 보냈으면 모를까 이제와 잘 안된다고 학원에 의지하게 하는 게 과연 좋은 걸까. 열정적이던 학기 초와 다르게 J의 반응도 시큰둥한 반응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아, 이래서 뭐든 때가 중요한 거구나.' 생각하며 조금만 더 고민해 보자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J가 하원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늘 유치원에서 줄넘기를 연속해서 3번이나 넘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정말? 1년 내내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던 게, 갑자기 됐다고?” 우리는 이른 저녁을 먹고 아파트 체육관으로 향했다. 반박자씩 느리게 줄을 돌리면서도 그에 맞게 반박자씩 쉬어가며 두발을 따단 따단 구르며, 줄넘기를 연속으로 자그마치 10번이나 넘기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또 스무 번, 서른 번을 넘기기까지.
J는 싱글벙글이었다. 별 말은 안 했지만, 1년 내내 잘하는 아이들 틈에 끼여 본인도 오죽이나 답답했을까. J는 환하게 웃으면서 폴짝폴짝 몇 번이고 다시 줄넘기를 넘고 또 넘었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잘 안 돼도 포기하지 않고 연습해 온 지난 시간들이 너무 기특해서, 남편과 나는 소리 내어 웃어댔다. 줄넘기가 뭐라고. 처음 엄마라고 했을 때처럼, 처음 걸음마를 뗐을 때처럼, J가 꺄륵 웃으며 게걸음으로 엉거주춤 줄넘기를 한 번 넘을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가슴에 행복이 번진다. 이렇게나 행복한 줄넘기라니.
그 긴 시간을 끓지 않던 물이, 이제야 임계점에 다 달아 끓기 시작했던 걸까. 그래,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이 그랬다. 한 발 자국을 걷기 위해 수 없이 넘어져도 응당 그러려니 하고, 계속 손뼉 치며 응원했었다. 실패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대신 밀어주고 끌어준다고 한들 뭐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어떤 일이든 해도 해도 안 되는 순간이 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선물처럼 그 성과가 나오지 않았던가. 한 번의 성공이 있기까지 모두 다 실패인데 어째서 그 실패를 문제 삼으려 했을까. 이런 성취의 기쁨을 오롯이 너의 것으로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이런 인생에 몇 안 되는 멋진 장면을 학원에 빼앗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우리 아이가 앞으로 실패를 거듭해야 할 것이 어디 줄넘기뿐일까. 우리는 아마도 앞으로 더 자주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남들보다 더 빨리 경험하게 해 주지 못한 것들에 대해. 남들만큼 더 많이 해 주지 못한 것들에 대해. 하지만,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치는 값진 것들은 거듭되는 실패를 딛고 일어선 다음에만 주어진다. 자기 스스로 실패를 딛고 일어서야, J는 더 행복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러니 나의 조급함에서 나온 후회는 서랍 속에 넣어두기로 한다.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시계가 있고, 그 시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뒤에 빛을 바랄 것이다. 아직 후회하기엔 너무 이르다. J가 더 많이 실수하고 더 많이 넘어질 수 있도록 조급해하지 않고 더 오래오래 기다려 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엄마 나도 친구들처럼, X자 줄넘기랑 2단 뛰기도 하고 싶은데 줄넘기 학원 보내주면 안 돼? 응?
그..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