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이었다. 주저 앉기에는 너무도 서러운,

사랑하니까 후회는 필연이었다.

by 낯글


마흔다섯이었다. 아빠가 처음 뇌출혈로 쓰러지셨던 나이가. 그때는 몰랐다. 마흔다섯이라는 나이가 뇌출혈의 후유증으로 주저앉기에는 너무도 서럽게 젊은 나이라는 것을.


마흔다섯의 그날부터, 일흔이 되어 돌아가신 마지막날까지. 매 해, 혹은, 매 달, 우리 가족은 수술실 앞을 서성거렸고 아빠는 다양한 병명으로 중환자실을 오갔다. 뇌출혈을 치료하면 심근경색이, 심근경색을 치료하면 전립선암이, 위기를 넘겼나 싶으면 어김없이 또 다른 곳이 말썽이었다.


어느 날, 회사에서 급히 병원으로 불려 나온 나에게 의사는 '뇌간'을 건드리는 수술이니 '즉사' 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사인을 하라며 수술동의서를 건넸다. 최악의 상황에 대한 문구들이 쓰여 있는 동의서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나를 향해 의사는 쌀쌀맞게 말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인데 왜 아직도 눈물을 흘리냐고, 언제든지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이제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의사의 말을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싶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의사는 그저 피곤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물론,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병실에서, 응급실에서, 중환자실에서, 앙상해져 가는 팔뚝에서, 끓는 가래로 거칠어진 숨소리에서, 기운이 쇠하다 못해 초점을 잃어가는 눈빛에서, 점점 어눌해져 가는 말투에서, 삼키지 못하고 뱉어버린 음식물이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대소변 문제에서. 그러니까, 매일의 삶 속에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사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했던 오늘은 또다시 내일로 이어졌고, 한 달은 또 다음 달이 되었으며, 한 해는 또 그다음 해로 이어졌다.


병원사진.jpg


아빠가 죽음의 문턱을 서성이며 몇 번의 고비를 넘겼던 그 25년 동안,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담담하게 생활을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의사의 말은 단지 최악의 상황에 대한 경고일 뿐이라는 '긍정'의 마음으로 버텨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미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후회로 얼룩진 삶을 살고 있던 나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자'는 다짐으로 붙들었다. 다만, 아빠를 간병해야 한다는 이유로 내 삶을 포기하지는 말자고. 그렇게 현재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해 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지만, 죽음의 위협과 간병의 고됨으로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고 지긋지긋해져 버린 날에는, 그러니까 또래의 친구들처럼 이번 휴가는 강원도로 갈까 부산으로 갈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심근경색으로 괴사가 진행된 발목을 절단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던 날에는, 당신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고된 삶은 정말이지 끝이 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 생각이 아빠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더 나아질 수 없는 상황.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는 현실에서 최선을 다 하지 않았냐고. 아직도 부족한가요? 아직 더 불행이 남아있나요? 라고 하늘에 물었던가.


BLSE1750.JPG


사실 아빠가 많이 미웠다. 엄마를 고생시키는 것도 모자라 까탈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하게 그녀를 힘들게 했던 아빠를. 나에게 칭찬이나 응원의 말을 건네는 대신 늘 왜 더 잘하지 못하냐고 비난하던 아빠를. 간병 때문에 끝도 없이 나를 집으로 주저앉히면서도 미안해하지 않던 아빠를. 그렇게 미웠지만 최선을 다 했으니까. 땀에 젖도록 안마를 하고, 콧줄로 식사를 넣어드리고, 가래를 빼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키고, 나의 20-30대를 그렇게 할 수 있는 만큼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운명은 그런 나를 비웃 기라도 하듯 어느날은 아빠의 의식마저 가져갔다. 의식이 없는 아빠를 앞에 두고서야.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고, 최선을 다 했으니 된 거라고, '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오만했음을 알았다. 그제야 진실로 그 악몽 같았던 기나긴 간병 생활이 다시 올 수 없는 나날들이었음을 깨달았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최선일 수 없었던 하루하루를 필연적으로 후회하고 있는 나 자신을 마주했다.


그때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 기도는 최선을 다했으니 아빠를 편히 보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아빠를 다시 살려달라는 기도였다. 아빠가 잠깐이라도 정신이 돌아온다면, 그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그때는 지금과 달라지겠다는 - 후회였다.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아빠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를 달라고. 이 모든 생각들이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한 나 자신을 위한 이기심일지라도 한 번만 더 살려달라고. 지난날을 후회했다. 새벽에 아빠가 소변통을 비우라고 깨울 때에 한 번에 일어나지 않고 짐짓 몇 번은 모른 척하고 싶었던 것. 한없이 약해진 아빠가 이유도 없이 화낼 때 나도 같이 짜증을 냈던 것. 원하는 직장에 나갈 수 없게 나를 주저앉혔던 아빠를 마음으로 원망했던 것. 지난 시간들을.


아빠는 며칠 뒤 깨어나셨다. 아빠가 깨어났을 때 "아빠, 미안해. 내가 더 잘할게. 우리 이제 집으로 가자"라고 했고, 아빠는 "그래, 그러자"하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내 손을 꼭 쥔 아빠의 손은 그날따라 유난히 따뜻했다. 그렇게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기회를 준 아빠는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몇 주 지나지 않아 하늘나라로 가셨다.


120601278_154108069688767_7356584208400415217_n.jpg


천원샵에서 조차 물건 하나를 함부로 사지 않으면서 아끼고 아껴 재테크를 하셨던 아빠는 그 긴 병에도 불구하고 그간 모아놓은 것으로 병원비를 모두 해결하셨다. 재 입사 후 직장생활과 간병을 병행하기가 너무 힘들어 주말에 간병인을 부르면 자꾸만 돌려보내서 나를 더 힘들게 하던 아빠를 원망했던 적이 있다. 늘 병원비에 전전긍긍하신 것은 다만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얼마간이라도 남겨주고 싶으셨던 아빠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우리 집 앞에서 아빠를 만났던 기억에 대해 말했다. 그 친구가 우리 아빠를 본 적이 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아빠가 건넸다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내게는 한 번도 살갑지 않으셨던 아빠가 "우리 00랑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라고 하셨다고. 그렇게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당신의 사랑이 존재했음을 발견하곤 한다.


한때는 내가 최선을 다한다면 후회를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후회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그러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한 번 사랑을 말했다면, 두 번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열 번 상처를 주었다면, 아홉 번으로 줄이지 못한 상처를 후회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후회를 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살아가기보다, 덜 후회하기 위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아빠, 나도 이제 몇 년 만 지나면 마흔다섯이네. 그때 아빠 너무 젊었다. 나는 맹장으로 수술대 한 번 올라가는 것도 이가 딱딱 부딪치게 무서웠는데. 아빠는 그걸 어떻게 다 견뎠어? 그렇게 자주 위험한 수술을 했는데 아프다는 말 한 번을 안 해서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 많이 힘들었지? 아빠한테 툴툴댔던 거 많이 미안해. 아빠한테 더 잘하지 못했던 거 많이 후회해(사랑해)."


111281035_2633321000241485_8161637758169185179_n.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