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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호 Jun 03. 2024

[왜 61. 왜 사피엔스는 진화하는가?]

호모 스마트포티쿠스에서 호모심비우스로!


호모 스마트포티쿠스(Homo SmartPhonicus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


스마트폰과 하루를 시작하고 스마트폰과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

친밀과 의존의 중간에서 시간의 축을 쌓아가고 공간을 확장하는 사람들.     

인공지능으로 만든 저작물을 예술로 인정하며 진짜의 아우라가 사라지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지난날의 가치는 작아지고 있습니다. 수용자가 받아들이고 예술로 인정하면

되고 아우라는 내가 느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예술의 영역이 확장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을 보며 자란 세대와 함께 살아갑니다.

이제 만든 것을 그냥 보는 시대에서 인공지능으로 쉽게 만드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이 준 답을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분석하는 힘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고 구별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여기지만

역설적이게도 진짜의 가치과 의미는 더 커질 것입니다.          

소셜미디어와 게임에 몰입하고, 같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세상은 기후위기, 경제위기, 평화위기로 불안투성이지만 스마트폰 속에서 즐거움과 안정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종이 사용은 줄어들고 화면을 대하는 시간은 늘어가고 있습니다.

MZ세대는 화면이 더 친숙하고 비대면이 더 편리하다고 여기지만

디지로그 세대인 5~60대는 아날로그와 종이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가상과 상상으로 얽히고설킨 새로운 공동체 속에서

만남과 이별은 지속되고 신인류의 관계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가상 세계인지 가짜 세상인지 구분이 모호한 세상 속에서

의미 있는 진짜 노동인지 무의미한 가짜 노동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만든 알고리즘 속에서 공허한 일에 매여 가짜 노동에 시간을 허비하는 삶을 벗어나

사회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소박한 보람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2023년 12월에 개봉한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은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이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루 감독이 1952년에 만든 <이키루(살다>라는 영화를 리메이크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이키루>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시청 민원실을 담당하는 공무원입니다.

그는 타성에 젖어 의미 없는 삶을 좀비처럼 살아갑니다. 동네 주민이 커다란 물웅덩이에 모기가 들끓으니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원을 만들어 달라고 민원을 제기하는데 다른 부서로 떠넘기고 시간만 때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아이들을 위해 놀이공원을 만듭니다. 그날 밤 와타나베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인생은 짧다. 사랑하라 소녀여”라는 노래를 부르며 삶을 마감합니다.      

<리빙:어떤 인생>의 각본은 <남아 있는 나날>로 맨부커상,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맡았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인물의 심리묘사를 섬세하게 잘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원작을 바탕으로 영국 상황에 맞게 각색을 했습니다. 시청 공무원 윌리엄스(빌 나이)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고약한 관료제 탓에 동네 주민들의 민원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윌리엄스가 나서서 동네 폐가를 놀이터로 바꾸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윌리엄스는 신입 직원 웨이클링(알렉스 샤프)에게 “어떤 목표를 위해 매일 애쓰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날들이 찾아오면, (…) 우리의 작은 놀이터가 완성된 순간에 느꼈던 소박한 보람을 떠올려보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전합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생각하며 마음을 바꾸거나 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환(轉換) 또는 회심(回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톨스토이가 노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며 쓴 소설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찍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이 의미 없는 가짜노동을 하며 살아온 것을 끔찍하게 여긴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어린 아들이 다가와 손등에 입 맞추고 진심 어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며 위로와 사랑을 느낍니다. 그 이후 이반 일리치는 가족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느끼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생을 마감합니다.      


와타나베, 윌리엄스,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을 보며

화면의 세계에서 나와 사회공동체에 어떤 ‘보람’과 의미 있는 ‘놀이터’를 완성할지 생각해서

실행해 보려 합니다.      

호모 스마트포니쿠스(Homo SmartPhonicus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와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공생하는 사람)

사피엔스의 진화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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