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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May 24. 2023

전 상품 만원 세일

이놈의 옷들. 아끼다 똥 만든 아빠보다 내가 더 제대로 팔고 있다고!



아빠 가게를 정리하기로 결심한 지 어느덧 두 달의 시간이 지났다.


한 달은 집에 있는 아빠와 사투를 했고, 나머지 한 달은 요양병원에 보낸 후 파도처럼 넘실대는 감정들과 사투를 해야 했다. 그리움이 짙어질수록 아빠의 흔적들을 정리하고픈 마음이 강해졌다. 왜인지는 모른다. 주인 없이 덩그러니 닫혀있는 아빠의 가게를 보며 더 이상 서글픔을 느끼고 싶지 않아 그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음의 준비는 거의 다 되었다. 당장 남편과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빼고 버리고 뒤지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가와 한 마디씩 붙인다.


"여기 사장님 어디 아프세요? 한참을 안 보이셔서 궁금했는데"


상권이 죽은 조용하고 오래된 오피스텔 2층. 입주민이거나 근처 상점의 사장님들이다.


"네. 아프셔서 요양병원에 계세요. 이제 가게를 정리하려고요"

"에고.. 쯧쯧.. 그러셨구나."


혀를 차며 지나가는 그들을 보며 마른침을 삼킨다. 아빠의 신변을 전하는 일이, 잔뜩 파헤쳐진 마음을 꾹꾹 눌러 정리하고 다지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와씨 장난치냐. 옷 왜 이렇게 많아??"


가게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짐들을 정리하던 남편이 기어코 탄식을 내뱉는다.

아빠의 옷은 상상 그 이상으로 많았다. 거의 호더-그 살짝 아래의 경계 어딘가에 걸친 수준이었다. 가게 안 창고에, 행거 아래에 빽빽하게, 여기저기 숨겨둔 박스 속에서 쉴 새 없이 옷들이 줄줄 나왔다. 가게 밖 옷을 거치해 둔 가벽 아래 아무런 잠금장치 없이 헐겁게 보관된 수납장안에도 빼곡했다.


아빠의 보물들이다. 아빠는 항상 이 옷들을 본인의 재산에 포함을 하여 가치를 계산하셨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옷 다 팔면 못해도 몇천은 나온다니까~"

그것은 그 옷을 팔 때의 일이고, 팔지 못할 때는 떨거지 재고품일 뿐인데 말이다.

"이 옷은 이태리제 고급 원단이고, 이건 프랑스에서 온 거고, 이건 메이카-제품이다. 못해도 이삼십은 받아야 해"

택이야 바꿔달면 그만, 요즘처럼 옷이 흔해진 시대에 이삼십만 원 하는 옷을 이런 구멍가게에서 살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온니 현금만 받겠다는 곳에서 말이다. -가게의 카드 계산기는 고장 난지 오래고, 아빠는 그걸 고치지 않았다. 카드 손님은 받지 않겠다는 다짐인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10년 넘게 그런 식의 장사를 해왔다. 그것은 탈세다! 라며 비난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탈루할 만큼의 세금조차도 없는 처참한 매출 상태임을 밝힌다.-

그러니 당연히 아빠의 옷은 팔리지 않았다. 간혹 가뭄에 콩 나듯, 형편이 넉넉한 단골들이 몇 벌의 옷을 사갔고, 그 수입은 다시 옷을 사입해 오는 밑천이 되었다. 나의 무시 섞인 방관 아래 그렇게 아빠의 옷들은 무한 증식을 했고, 그 결과를 직접 마주하니 이 좁아터진 가게에 이만큼의 옷을 보관해 둔 아빠의 수납 능력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이걸 어찌할 방도가 없어 의류 덤핑처리 업체에 연락을 해보니 킬로 수로 값을 측정한다는데 예상 금액은 생각보다 너무 형편없었다. 기분이 팍 상해버려서 오기가 생겼다. 생각보다 옷이 나쁘지 않은 것도 같고, 한번 팔아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전 상품 만원 세일'


아빠의 소중한 가치들은 일괄적으로 후려쳐져 만 원이 되었다. 정장 재킷도 만 원. 바지도 만 원. 아주 비싸 보이는 가죽 재킷도 만 원. 아마 아빠가 알면 거품 물고 뒤로 넘어가겠지? A3 용지에 큼지막하게 출력하여 가게 벽면에 죽 둘러 붙였다. 나도 본업이 있으니 딱 한 달간 매주 금-토에 나와 옷을 팔기로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첫 고객은 썬이었다. 알게 된 지 6개월 남짓밖에 안되었지만 이미 찐한 전우애로 내적 친밀도 100프로를 찍은 썬과는 한 달-두 달간에 한 번씩은 꼬박 만나서 입을 털어야 생존이 가능한 사이가 되었다. 그날도 썬은 우리 집에 놀러 와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아빠 가게를 비울 거 같다. 한번 구경 와라' 하며 별생각 없이 한 제안에 급! 이벤트가 생성되어 함께 두 정거장 거리의 가게로 향했고 썬은 "야! 보물섬 같다!!" 하면서 상태가 좋고 깔끔한 옷을 야무지게 골라 행거 하나를 꽉 채워 가져갔다.


"삼촌이 너무너무 좋아하셔.  옷 완전 좋은데!? 고마워 정말! "


그날 밤 썬의 연락을 받고 아빠 가게의 옷이 괜찮다고 생각한 게 나뿐만이 아니구나를 느낀 나는 그때부터 대대적으로 개인 SNS에 홍보를 했고 친구들이 하나둘씩 옷을 털러 오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만족도와 비례하여 우리 아빠에게도 재능이 있었구나.라는 마음이 커져가는 신기한 깨달음을 얻었는데, 사실 난 여든의 아빠에게 어떠한 미래도 가능성도 보지 못했다. 아빠는 나의 출생 이전부터 저무는 황혼과도 같은 삶이었다. 실패와 실패로 점철된, 더 이상의 반전 없이 그저 늙고 병들어갈 날만 남은 인생. 그런 아빠를 보며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정도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칭찬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뚜렷한 재능이!( 마케팅과 사업 구상 과정에서 똥망해서 그렇지.)

트렌드를 두발 정도 앞서가버린 아빠의 안목 탓일까. 주인을 찾지 못해 한참을 처박혀 있던 것 같은 블루종은 같은 층에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하던 고등학생 손에 쥐어져 만 원에 팔렸다. 학생은 가게에 들어와 '우와! 우와 이 옷들이 다 만 원이라고요? 용돈 받아서 다시 올게요.'라며 흥분한 채 돌아갔다. 

브랜드 옷만 고집하던 남편도 '이 옷은 내가 입으면 좋겠는데?' 하며 두어 벌을 딱 집어 은밀한 곳에 꿍쳐 뒀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온 남편의 대학 친구와 점퍼 한 벌을 가지고 소유권 논란으로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친한 언니는 와서 '이곳은 파라다이스다!'라고 외치며 행거 세 개를 꽉 채워 가져갔고, 그렇게 가게 구석데기에서 몇 년이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클래식한 정장 재킷은 그녀의 회사 소속 아티스트에게 입혀져 함께 공연을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아빠는 여든의 나이에도 옷을 입을 때 톤 온 톤 컬러 매치를 기가 맥히게 하셨는데, 그것은 의류를 전공한 남편도 엄지를 척 들고 인정할 수준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재능은 뒤늦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빠가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친구들이 몰려와 행거를 하나씩 차지하고 정신없이 옷을 털고 있으니,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다 이내 함께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아빠의 가게가 존재한 이래 가장 북새통을 이룬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사람이 몰릴 때는 계산을 하다 정신이 쏙 빠질 정도로 바빴다. 아빠가 정정하게 가게를 운영했던 시절 " 좀 싸게 싸게 팔고 재고 정리 좀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넌지시 꺼냈다가 천하에 둘도 없는 대역 죄인처럼 욕을 먹었던 기억이 생각나면서, 비록 만 원짜리로 몸값은 떡락했으나 생애 (?) 최고의 가치를 자랑하며 봉투에 담기는 아빠의 옷들을 보며, 통쾌함마저 느껴졌다. 이놈의 옷들. 아끼다 똥 만든 아빠보다 내가 더 제대로 팔고 있다고!


만 원짜리 지폐를 찹찹찹 새면서, 통쾌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끼는 기분이란, 병원 들어가시기 전 이렇게라도 물건 파는 재미를 느끼고 가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우면서도 심술이 울컥 났다. '욕심쟁이 대머리 같으니라구..'

올 사람은 대충 다 왔다 가고, 어느 정도 옷들이 빠지니 공치는 날들도 많아졌다. 그런 날은 그저 아빠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아빠가 보던 티비를 켜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일이었다. 창문하나 없는 상가층에서 시간도, 날씨도, 계절도 못 느끼는 이 적막한 공간에 앉아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 이곳에서 아빠의 시선으로 아빠의 공간을 본다. 그러면 열려있는 가게 문틈으로 아빠를 알던 사람들이 종종 찾아와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보곤 한 마디씩 하고 돌아갔다.


"할아버지 아주 멋쟁이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사장님이 가끔 옷도 서비스로 주곤 하셨죠. 통이 크신 양반이었어~"

"할아버지 못 본다니 너무 서운하네요."

"우리 회장님 쾌차하시길 바란다고 전해줘요~"


그토록 골칫덩이 같고 돈 먹는 하마 같았던 아빠의 가게였다. 접는 마당에 지긋지긋한 옷더미들, 떨이로 후려쳐서 단돈 십만 원이라도 벌어보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고 매주 이틀은 그곳에서 시간을 써야 하니 부담스러운 점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아빠의 공간은 나에게 십만 원 이상의 보답을 해주었다. 비로소 아빠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진 도대체 왜 가게를 저렇게까지 못 놓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번 일을 통해 아빠의 삶을 여행하며 그의 안식처이자 우주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빠의 옷들은 그렇게 전국방방곡곡, 내 친구들의 남편이나 부모님, 삼촌, 사촌들에게 널리 널리 퍼져 인증샷도 날라오고 만족후기도 날라왔으니 별로 한 것도 없이 감사인사만 잔뜩 받게 해 준 바로 이것이 아빠가 나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리지 않은 옷은 대충 정리해 덤핑으로 넘기니 10만 원 정도가 나왔는데, 점포 계약금에서 원상복구 비용을 빼니 200여만 원 정도. 옷 판매금액까지 포함하니 대략 350만 원 정도의 돈이 생겼다. 그렇게 아빠의 20년 지기 가게는 나에게 350만 원을 남겨주고, 애물단지가 아니었음을 증명한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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