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 시절 후지산을 정복했어. 담임 선생님이 등산 광이었는데 개방 시기에 꼭 간다고 하더라. 우리에게 물었지. 함께 오를 사람이 있느냐고. 새똥만큼의 도전 정신을 가진 나는 지원했고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을 따라 산으로 갔어.
후지산의 높이는 해발 3779m. 산의 시작점에서부터 등산을 하지 않아. 어느 지점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서 시작하는데, 정확히 몇 고메에서 오르기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질 않네. 아무튼 정상까지 가는데 족히 8시간 이상은 걸렸던 걸로 기억해. 출발은 저녁 10시. 새벽 내도록 산을 타는 거야. 머리에 랜턴 하나 쓰고 까만 산을 오르고 또 올라. 등산하기 전 챙긴 준비물 중 하나가 초콜릿이야. 걷다 보면 당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이 초콜릿 하나가 정말 기가 막혀. 후지산을 등반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 보니 다양한 인종이 같은 경험을 하려고 그곳으로 모여. 우리는 걷다가 지치면 산 중턱 어딘가 아무렇게나 짐을 던져 놓고 쉬었는데 그때 챙겨 온 물과 초콜릿을 꺼내 먹었어. 주변에 외국인들이 숨을 헐떡이며 물만 마시고 있길래 말없이 그것을 내밀었어. 짧은 영어로 간간히 대화도 나누며 정을 전했지. 힘내자, 힘내자. 우리 끝까지 올라가자. 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초콜릿 하나로 파란 눈과 검은 눈이 같은 마음을 나누었어. 진하고 달콤하게.
새까만 어둠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나를 감쌀 무렵 정상이 보여. 가장 고비인 건 100m를 남긴 지점.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아. 고지가 눈앞에 있는데 다가오질 않는 거야. 7시간 남짓을 걸어 올라왔는데 힘들지 않았거든. 그런데 고작 100m를 앞두고 그렇게 포기하고 싶더라. 그때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줄 알아? 뒤를 돌아봐. 내가 올라온 길을 보게 되는 거야. 다시 내려가고 싶다. 내려가야 할까. 우습게도 내려가는 길이 더 멀고 험해서 엄두도 못 내. 그렇다고 멈춰 있을 수는 없어. 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길이 좁아져서 사람들이 줄 서 걷게 되거든. 내가 멈춰버리면 정체가 되는 거야. 앞으로 치고 나가야만 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어깨에 내려앉는 거지. 선택권이 없어.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 해.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쉬지 못해. 참 지독하더라, 그 순간이. 내가 왜 이곳을 오르겠다고 했을까. 정상에 도착한들 그게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 거라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마음으로 온갖 저주를 퍼부어 자신을 질책해. 그 정도로 힘들었어. 겨우겨우 도착한 정상에 뭐가 있게? 아무것도 없어. 정말 아무것도 없더라. 끓는 용암이 잠든 커다란 분화구와 정상을 알리는 큰 비석 하나. 그리고 지친 사람들. 그게 전부야. 참, 허탈해 보이지? 아니, 마음이 꽉 차. 사람들은 모두 지쳐 헐떡이고 있지만 표정만은 반짝이고 있었거든. 분화구는 무서울 정도로 크고 깊어서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을 들게 했지. 무엇보다 해냈다는 성취감.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은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어. 그 정도야. 그 순간, 내가 오른 이 길이 삶과 닮았다고 느꼈어. 그리고 다짐했어. 살아가며 힘든 일이 있을 때 지금 이 시간을 꼭 기억해 내겠다고. 내가 오른 길에서 나눈 따뜻한 온정과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을 말이야.
집으로 돌아와 흙투성이가 된 발을 사진으로 남겼어. 이날을 잊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마음에 한 장 머리에 한 장 카메라에 한 장. 오래된 카메라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아서 사진은 찾을 수 없어. 하지만 괜찮아. 그 시간과 장면, 그때의 감정을 마음이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
어떤 일이든 다 똑같아. 사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살아내는 것도. 그러니까 힘들고 지쳐도, 또 그 일이 끝없이 반복된다고 해도 겁먹지 마. 결국엔 해낼 거고, 그곳엔 반짝이는 표정을 한 많은 사람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