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란 Jul 21. 2021

쭉정이 옥수수

구룡산 아래에 있는 옥수수 밭이 소란스러워요. 감나무집 할머니네 옥수수 밭이에요. 

 “옥수수 여러분, 모두 주목!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으세요.” 

 검붉은 수염을 늘어트린 옥수수 아저씨가 연설을 시작했어요. 이제 막 여물기 시작한 어린 옥수수들은 존경하는 눈빛으로 옥수수 아저씨를 쳐다보았어요. 

 “에~ 우리 가문은 먼 옛날부터 빛깔 좋고 찰진 몸매를 가진 씨옥수수 가문입니다. 에~또, 처마 밑에 매달려 온갖 시련을 견뎌 낸 옥수수만이 자손을 퍼트릴 수 있는 단단한 씨옥수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몸을 정갈히 해서 훌륭한 씨옥수수가 되도록 힘씁시다.”

 옥수수 아저씨의 말에 어린 옥수수들의 알갱이가 자부심으로 반들반들 윤이 났어요. 하지만 옥수숫대의 제일 밑에 달린 막내 옥수수는 왠지 시무룩해 보여요.  

   

 얼마 전 옥수수의 알이 차기 시작할 무렵이에요. 지나가던 들쥐 한 마리가 맨 밑에 있는 막내 옥수수를 손으로 꾹꾹 눌러보았어요. 

 “에그, 텅 빈 쭉정이네. 쭉정이야.”

 하더니 서리태콩 밭으로 그냥 쪼르르 가버렸지요. 

 “뭐? 내가 쭉정이라고? 텅 비었다고?”

 막내는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어요. 

“막내야, 넌 아직 어리잖아. 좀 더 크면 알이 꽉 찬 옥수수가 될 거야.”

 바로 위에 달린 작은 형이 막내를 달랬어요. 하지만 큰 형은 한겨울의 눈보라처럼 쌀쌀맞게 말했어요.

 “모르면 가만히 있어. 쭉정이로 태어난 옥수수는 절대 알이 차지 않아. 괜히 헛된 꿈꾸지 말고 들쥐 밥이 안 된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큰 형의 말에 막내는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가만히 지켜보던 옥수수 아저씨도 혀를 쯧쯧 찼지요.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쭉정이였구나.”

 막내가 쓸쓸하게 중얼거렸어요. 막내가 쭉정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산새들도 들쥐들도 막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가끔 괴롭히는 동물들도 있었어요. 어떤 날은 박새가 지나가다 괜스레 막내 옥수수를 부리로 콕콕 쪼아 보기도 하고, 청설모가 꼬리로 툭툭 건드려 보기도 했어요. 그럴 때마다 큰 형은 ‘핏’하며 비웃었어요. 막내 옥수수는 껍질 안에 틀어박혀 죽은 듯 꼼짝도 안 했어요. 막내 편을 들어주던 작은 형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요. 

 

 며칠 후 막내 옥수수의 마음처럼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어요. 바람도 점점 거세어졌지요. 태풍이 오려나 봐요. 막내도 무슨 일인가 싶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어요. 난생처음 겪는 태풍의 바람에 옥수숫대가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처럼 휘청거렸어요. 정말 무시무시한 바람이었어요. 나무와 풀들이 마구 비명을 질러댔어요. 특히나 옥수수 밭의 맨 앞줄, 제일 꼭대기에 있던 옥수수 아저씨는 빨간 수염이 다 뽑혀 나가는 것 같았어요. 막내를 놀리던 큰 형도 정신없이 휘청대고 있어요. 막내는 조금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어요. 너무 센 바람에 옥수숫대가 쓰러질까 봐 무서워졌어요. 위에 있는 옥수수들도 걱정되기 시작했지요. 

 “모, 모두 괜찮습니까? 바람은 곧 지나갈 겁니다. 모두 옥수숫대를 꼭 붙들고 절대 놓지 마십시오.” 

 옥수수 아저씨는 역시 대단해요. 그 와중에도 어린 옥수수들을 격려해 주고 있어요. 하지만 쉽게 바람이 가라앉지 않자 늠름하던 아저씨도 버티기 힘들었어요. 눈앞도 점점 흐릿해졌지요. 안절부절못하며 위만 쳐다보던 막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고 하는 아저씨를 향해 마음속으로 소리쳤어요.

 ‘아저씨, 힘내세요. 쓰러지면 안 돼요. 우린 모두 아저씨만 믿고 있어요.’

 고개를 젖히고 위만 쳐다보던 막내의 몸이 조금씩 기울어졌어요. 옥수숫대에서 떨어질 것 같아요. 그동안 제대로 먹지 않아 많이 약해졌나 봐요. 그때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어요. 

 “워매, 이를 워쩐댜! 옥수수 다 뽑히겄네.“

 바람 소리에 섞여 어디선가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어요. 바로 주인 할머니의 목소리예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할머니가 잰걸음으로 달려왔어요. 평소에는 달팽이만큼이나 느리던 할머니였는데 말이에요. 할머니는 옥수수 밭의 둘레에 서 있던 모든 옥수숫대에 일일이 노끈을 감아 연결시켜 주었어요. 그러자 옥수수들이 모두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어요. 이젠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옥수수 아저씨와 모든 옥수수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어요. 할머니도 밭둑에 앉아 허리를 툭툭 두드렸어요. 할머니의 주름 잡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어요. 

 “후유! 이젠 괜찮겄지?”

 할머니는 옥수수 밭을 한번 휘 둘러보았어요. 그때 부러질 듯 꺾여 있는 막내 옥수수가 눈에 들어왔죠. 

 “에구, 이 녀석은 그냥 두면 떨어지겠는걸.”

 할머니가 남은 노끈으로 막내를 옥수숫대에 묶어 주었어요. 그리고는 느릿느릿 쓰러질 듯 집으로 돌아갔지요. 


 태풍이 지나가고 꿀맛 같은 햇살이 옥수수들을 포동포동 살찌웠어요.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옥수수 아저씨의 연설을 들으며 무럭무럭 자랐어요. 막내도 조금씩 기운을 차렸죠. 하지만 막내 옥수수는 휘청거리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자꾸 생각났어요. 며칠째 밭에 얼굴도 못 비추는 할머니가 걱정돼서요.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나왔어요. 

 “그동안 잘 있었누? 허리가 아파서 한동안 못 나왔더니 잡초가 많이 자랐구먼.”

 할머니가 굽은 허리로 잡초를 뽑아 주었어요. 할머니의 허리가 눈에 띄게 더 휘었어요. 아마 태풍이 불던 날 많이 힘들었나 봐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 막내 옥수수는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때 잡초를 뽑던 할머니가 막내 옥수수를 보았어요.  

 “아이고, 너는 왜 이렇게 못 컸냐? 잡초 때문에 햇빛을 못 봐서 그러냐?”

 할머니가 막내 근처에 있는 잡초들을 말끔히 뽑아 주었어요. 

 “햇빛 많이 보고 잘 자라라이.”

 할머니가 막내 옥수수를 어루만지며 말했어요. 그날 이후 할머니는 밭에 올 때마다 늘 막내 옥수수 밑의 잡초부터 뽑아 주셨죠. 다른 옥수수들은 씨옥수수가 되려고 옥수수 알갱이에 보랏빛 화장도 하고 탱글탱글 영글어 갈 동안 막내 옥수수는 오로지 할머니 생각뿐이었어요. 


 고추잠자리가 많아지고 모든 옥수수들이 알차게 들어찼어요. 수염도 모두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고요. 할머니가 큰 바구니를 수레에 얹고 옥수수 밭으로 나왔어요. 

 “어디 보자! 이쁘게도 영글었네.”

 할머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어요. 옥수수들도 자랑스럽게 할머니에게 속살을 보여 주었어요. 할머니가 정성스레 옥수수를 한 개 한 개 따서 바구니에 담았어요. 막내 옥수수는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어요.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자 온기가 느껴져 설레었어요. 모두 바구니에 실려 할머니의 집으로 갔어요. 할머니는 옥수수의 어느 것 하나 함부로 버리지 않았어요. 껍질을 벗겨 깨끗한 것은 햇빛에 말렸어요. 옥수수수염도 함께요. 모두 얇은 속껍질만 남기고 수줍게 알몸을 드러내며 할머니의 선택을 숨죽여 기다렸어요. 꼼꼼히 살펴보던 할머니가 네 개의 옥수수를 따로 골라냈어요. 네 개 모두 탱글탱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씨옥수수가 되기에 충분해 보여요. 쌀쌀맞은 큰 형 옥수수도 선택되었지요. 큰 형은 막내가 보기에도 알갱이 하나하나 나무랄 데가 없어 보여요. 선택된 옥수수들은 기뻐서 휘파람까지 불었어요. 남은 옥수수들은 그저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기만 했지요. 막내 옥수수는 두 눈을 질끈 감았어요. 이제 소의 여물통에 버려지거나 거름 더미 위에 버려질 테니까요. 할머니와 조금 더 같이 지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별 수 없잖아요. 씨옥수수로 선발된 옥수수들은 속껍질을 들어 올려 상투처럼 틀고 처마밑에 매달렸어요. 그네를 타듯 바람에 건들건들 흔들리며 따스한 햇살에 일광욕을 즐겼지요. 나머지 옥수수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솥 안에 들어갔고요. 쭉정이 옥수수만 바구니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지요. 할머니가 구수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 옥수수를 쟁반에 올려 평상으로 가지고 왔어요. 한입 베어 물고는 처져 있던 눈을 동그랗게 떴지요.

 “워메, 맛있는 거! 내가 이 맛에 농사짓지.”

 큰 옥수수는 반을 뚝 잘라먹고, 작은 옥수수는 통째로 먹었답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어요. 할머니가 등이 가려운지 왼팔 오른팔을 번갈아 등 뒤로 올리며 긁적였어요.

 “아이고, 왜 이리 등이 가렵냐! 안 되겄네. 이걸로다가 효자손이라도 만들어야 겄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던 할머니가 막내 옥수수를 집어 올렸어요. 눈을 감고 이별을 준비하던 막내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요. 할머니가 막내 옥수수의 껍질을 벗기고 수염을 떼어내며 쓰다듬었어요. 

 “작다 했더니 쭉정이 옥수수였구먼. 효자손 만들기 딱이네, 딱이야.”

 할머니가 마당 한쪽에서 막대기를 하나 가지고 왔어요. 할머니의 팔 길이 정도 되는 막대기예요. 그리고는 막내의 엉덩이에 쑤욱 박아 넣었죠. 무언가 할머니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아팠지만 참았어요. 할머니가 막대기에 끼운 옥수수 심을 들어 올려 등 뒤로 넣었어요. 그리고는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며 등을 긁었지요. 처마밑에 매달려 있던 큰 옥수수의 눈도 휘둥그레졌어요.

 “히야, 효자가 따로 없구먼.”

 할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어요. 할머니의 따듯한 등을 막내 옥수수가 정성껏 긁어 주었어요. 

 “할머니, 시원하시죠?”

 막내 옥수수가 진짜 손자처럼 속삭였어요. 할머니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요. 막내 옥수수가 처마밑에 매달린 큰 옥수수를 보고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씨옥수수도 멋있지만, 할머니의 효자손이 되는 것도 멋지죠? 전 할머니 곁에서 오래오래 같이 살 거예요.”

 막내 옥수수의 몸이 기쁨으로 노랗게 물들었어요. 막내 옥수수는 등을 긁다가 할머니의 어깨 쪽으로 가면 톡톡톡 안마도 해 드렸어요. 막내 옥수수의 따듯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할머니는 어디를 가든 옥수수 효자손을 가지고 가신답니다. 옆집 할머니에게 우리집 효자라며 자랑도 하시고요. 그럴 때마다 막내 옥수수는 할머니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지요. 

 “할머니, 전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아요.”

  쭉정이 옥수수는 매일매일 할머니 등에서 속삭입니다. 할머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삭삭 긁으면서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