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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선생과 배롱나무

by 홍만식


고향 친구들과 가끔씩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이나 북한강 강변길을 따라 트레킹 한다. 친구들은 기업체 임직원 또는 선생님, 공무원 등으로 대부분 은퇴하였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때로는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토론하고, 이견이 생기면 격론도 벌이지만 뒤끝은 없다. 역시 친구는 오랜 친구가 좋다

지난 12월 초, 청평에서 북한강 강변길을 따라 서울 쪽으로 트레킹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숲을 걸으며 초겨울 정취에 흠뻑 빠져드는데, 신문기자였던 친구가 배롱나무 이야기를 슬며시 꺼냈다. 모교의 교정에는 한그루의 배롱나무가 기품 있게 있었다.


1970년대 고등학교 시절, 그 친구의 고향집은 학교에서 20여 리 떨어진 농촌 마을에 있었다. 교통이 불편하여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나 누나들과 시내에서 자취했다.

어느 날, 친구 부친(호 송암)은 집 마당에 있는 배롱나무를 학교에 기증하고 싶다는 뜻을 선생님께 전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교무회의 시간에 그 내용을 안건으로 올렸는데, 교장 선생님은 학부형의 순수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기념식수를 허락하셨다. 그 대신 학교 행정의 공정성과 공평성 등을 고려하여 외부에는 일절 알리지 않는 조건부 승낙이었다.

배롱나무는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어 백일홍 나무라고도 한다. 유학자들이 이 나무를 좋아하고 지금도 고택이나 서원에 가면 배롱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꽃말은 부귀 또는 헤어진 벗을 그리워함이다.


1917년, 송암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학을 배우고,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글을 읽으신 선비였다. 결혼 후 39세에 아들 하나를 낳아 대를 이을 자식이라고 지극 정성껏 키웠다. 그 친구 위에는 누나가 4명이고 여동생도 한 명 있다. 친구의 고향마을은 600여 년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홍 씨 집성촌으로 많은 선비가 살았다.

마을 동쪽에는 시원한 동해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고 뒤로는 멀리 태백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옆에는 솔숲이 우거지고 육백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마읍천이 유유히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해당화 향기도 그윽한 마을이다.


송암 선생은 집 마당에 있는 여러 배롱나무 중에서 가장 자태가 뛰어난 한 그루를 고르고 이식 준비를 마쳤다. 이튿날, 날이 밝아오자 송암 선생은 배롱나무를 지게에 지고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학교까지 가려면 약 4시간을 걸어야 하는데, 게다가 높고 험한 한재(지역의 고개이름)를 넘어야 한다.

고갯마루에서는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땀을 식히고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셨을 자그마한 체구의 송암 선생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때 그분의 연세가 55세, 아마도 이마에 땀이 흐르고, 적삼은 땀으로 흠뻑 젖었을 것이다. 마침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 학교에 도착하여 배롱나무를 자식과 같은 심정으로 교정에 정성껏 심으셨다.

송암 선생은 아들이 배롱나무와 함께 꿋꿋하게 잘 자라기를 소망하고, 또한 자식을 바르게 키워주는 학교와 선생님께도 배롱나무로 보답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친구들 표정이 숙연해졌다.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무거운 배롱나무를 어깨에 지고 왜 4시간이나 걸어서 학교까지 오셨는지 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기 때문이다. "오십 년 동안 아무에게 이 말을 할 수가 없었네"라고 말하는 친구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지로 자제하여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어머니의 자식사랑 이야기는 끝도 없다지만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생활 중, 아들에게 전답을 물려줄 수 없는 처지를 대신하여 '근(勤)과 검(儉)'이라는 글을 하피첩에 써 두 아들에게 보냈다. 즉, 물질보다 고귀한 아버지의 사랑을 자식에게 전한 것이다.


배롱나무를 기념식수로 심으신 송암 선생의 혜안과 선비 가풍에서 흘러나오는 의연함에 우리는 감동했다. 친구는 학교에 가면 기품 있게 서있는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고,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지만 늘 곁에서 격려와 용기를 주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을 잡고 열심히 공부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 성적이 월등하여 교육감 표창장을 받아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다.


친구는 대학을 졸업 후 동아일보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그리고 책임자 시절에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맹자에 관한 논문으로 공연예술학 박사학위를 받고, 특임교수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정년퇴직 직후에는 당시 의대생이었던 아들과 아프리카에 의료 봉사활동을 다녀왔으며, 또한 코이카(KOICKA) 국제봉사 단원으로 스리랑카에서 2년간 봉사활동을 하였다. 다시 남미 볼리비아로 봉사활동을 가기 위해 영월에서 힘든 교육을 마쳤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현했다. 아쉽게도 출국하지 못하고 국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친구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의사이고 둘째는 벤처회사의 책임자로 근무한다. 온 가족이 봉사활동을 생활화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교사 자격이 있는 친구 부인은 종합병원이 운영하는 병원학교에서 어린이 환자를 무료로 가르치는 등 사회봉사 경력이 무려 20년이다.


송암 선생은 82세의 일기로 1998년, 유명을 달리하셨고, 친구는 동해 바다가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아버님의 유택을 마련하였다.

우리는 올여름, 아버님의 산소에 성묘하여 감사함을 전하고, 모교에도 들러서 아버님의 사랑이 숨 쉬고 있을 배롱나무를 찾아보기로 약속했다.


한평생 선비의 자세로 올곧게 생활하신 송암 선생께 존경의 마음을 드리고 다시 한번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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