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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식 May 15. 2024

백꽁 할머니와 재봉틀

나의 외할머니 이야기


나의 외할머니 별명이 백꽁이다. 백꽁이란 말은 백가지 재주가 있고 이를 꼼꼼하게 잘 처리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별명이다.

강원도 동해시 松亭의 남양 홍씨 싼내댁 외동딸, 홍진녀(1894~1985년)는 어렸을 때부터 이 별명이 따라다녔고, 오라버니가 2대 북삼면장을 지냈던 홍옥섭이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이도(梨島)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강릉 김씨 감찰운곡공의 17대손 추담(湫潭) 김진탁이다.

전천호와 두타산

옛적, 백꽁의 진가는 날이 지날수록 이웃과 집안 문중에 널리 퍼졌다. 동네잔치나 제사 때 나물을 무치고 탕을 끓이고 어물이나 전을 부쳐도 손맛이 남달랐다. 또 손이 재빨라서 청소와 빨래는 물론 밭일도 옆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백꽁의 손재주를 익히 알아본 남편, 추담은 어느 날 서울에 갔다가 당시 엄청 귀한 손재봉틀을 사 왔다. 당시만 해도 북삼면(동해시의 옛 이름) 일대에서는 재봉틀을 파는 곳이 없었다. 백꽁은 밤낮으로 재봉틀 사용법을 손에 익히고 기계 원리를 깨우쳤다. 자연스럽게 '이도리에 사는 백꽁의 집에 가면 치마저고리도 하루 만에 만들어준다더라.'라는 소문이 나자 일감이 끝없이 밀려들었다.

외조부모 회혼식

백꽁의 막내딸인 나의 이모, 김춘옥은 아득한 옛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날, 가까운 친척인 새댁이 옷감 한 보따리를 이고 우리 집에 왔어요. 그 새댁도 시집올 때 재봉틀을 사 왔는데, 고장이 나서 구석에 처막아 뒀다면서 좀 가르쳐 달라 했어요. 새댁은 아예 하루 묵으며 어머니가 재봉으로 누비저고리와 치마를 만들어 나가자 연방 감탄했어요. '아이고 형님 솜씨는 새는 날 같소야. 어찌 그리 재빠르고 정확하게 잘 돼요?' 하며 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일본에서 정식으로 양재기술을 배웠던 올케 언니도 어머니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지요."


당시 북삼면에서 좀 산다는 집마다 재봉틀을 장만했지만 수시로 고장이 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고사까지 지내면서 "제발 우리 재봉틀이 탈 나지 않게 해 주세요." 하며 치성드리듯 빌 정도였다. 그러나 기계 자체에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라 사용법을 몰라, 대다수의 재봉틀은 방구석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백꽁은 귀한 것이 고장 났다며 애가 타는 집마다 다니며 고쳐주었다.

동해시 추암해변

백꽁 부부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모두 부모를 닮아 영특했는데, 이들 중 어머니의 손재주를 닮은 이가 장남, 東原 김영기다. 그는 훗날 향토사학자로 많은 업적과 책을 남겼는데, 각별한 손재주는 사진기와 인쇄술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사진기 자체가 귀하던 시절에 이미 예술사진이나 기록사진을 찍었고 암실과 현상 기구 일체를 집에 갖추었다. 그리고 송정동에서 문화인쇄사를 30여 년간 경영했다.

백꽁 부부의 자식들은 공교롭게 4명이나 '남양 홍씨'와 결혼했는데 두 딸과 장남, 차남의 배우자 모두 홍씨였다.

분토기2(김영기 著)

나의 외갓집은 북평읍(현 동해市) 이도리에 있었다. 배나무가 많아서 사람들은 이 동네를 '배골'이라고 다. 이 마을에는 강릉 김씨 감찰공파 후손들이 옹기종기 모여 농경생활을 하면서도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마을 서쪽에는 두타산과 취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옆에는 두타산과 백복령에서 흘러내리 전천()굽이굽이 흘러서 푸른 동해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정서가 넘치고 아름다운 이도리 마을이 아파트 숲으로 변해 옛 정취를 거의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고향을 찾아 이도리를 지날 때마다 재주와 인정이 많았던 백꽁 외할머니가 그립다.


(이 글은 동해문화원에서 발간한 '송정 이야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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