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아나키즘 ① -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와 진실

by 엠알

“아나키즘.”


이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혼란, 무질서, 폭력, 심지어 불법. 많은 사람들에게 아나키즘은 마치 사회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사상처럼 느껴진다. 마스크를 쓴 시위대, 화염병, 그리고 붕괴된 질서의 이미지들이 연상되곤 한다. 하지만 이 단어가 담고 있는 진짜 의미는, 그런 파괴적인 이미지만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단순히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권위 없는 질서’, ‘수직 구조의 부정’ 혹은 ‘자율적 존재들의 공동체’를 상상하려는 사유의 시도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디지털 공간과 게임들 안에서 은근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구현되곤 한다.


아나키즘은 반(反)체제인가, 비(非)권력인가?


아나키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의 고정관념을 버릴 필요가 있다. 아나키스트는 단순히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권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왜 우리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야만 하는가?

왜 사회는 위계 구조를 전제로 운영되는가?

인간은 스스로 질서를 만들 수 없을까?


19세기 중반, 프루동(Proudhon)은 “소유는 도둑질이다”라는 급진적인 말을 던졌다. 그는 국가나 종교, 자본처럼 권위와 권력을 독점하는 모든 구조를 비판했다. 그리고 대신, 상호부조와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를 꿈꿨다. 크로포트킨(Kropotkin)은 더 나아가, 자연계에도 경쟁뿐 아니라 협력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아나키즘이 비현실적이지 않음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려 했다.


아나키즘은 단순한 혼돈을 추구하지 않는다. 중앙 권력의 개입 없이도 사람들끼리 자발적인 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오늘날 온라인 커뮤니티, 오픈소스 프로젝트, 블록체인 네트워크 등에서 실험되고 있다.


게임은 원래 통제의 예술이다


그런데 게임은 이와 정반대의 매체처럼 보인다.


게임은 본질적으로 규칙이 있어야만 성립한다.


룰, 시스템, 조건, 승패, 메커니즘. 게임은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듯 보이지만, 그 모든 선택은 사전에 정의된 규칙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른바 “자유로운 통제”다.


그렇다면, 이런 본질적으로 ‘통제된’ 구조 안에서 아나키즘은 어떻게 들어설 수 있을까?


그 실마리는 바로 "유저의 자율성"에 있다.


일부 게임들은 플레이어에게 규칙을 해석하거나 변형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혹은 스스로 규칙을 만들 수 있도록 설계한다. 더 나아가, 어떤 게임은 완전히 무정부적인 세계를 제공하기도 한다. 거기서 플레이어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법도, 목표도 없이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


이런 게임들은 아나키즘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만약 국가도, 규칙도 없다면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까?’

‘자유롭게 살되,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곧 현실의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디지털 아나키즘의 실험실, 게임


아나키즘은 더 이상 먼 옛날의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다.


서버가 없는 서버리스 게임, 플레이어가 직접 운영하는 MMO 커뮤니티, 정해진 승패가 없는 샌드박스 월드, 유저들이 만들어가는 모드 문화. 이 모든 것들은 아나키즘적 상상력의 조각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게임을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실험장으로 바라보게 된다.

플레이어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다. 권위를 의심하고, 구조를 해체하고,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행위자다.


게임 속에서 그는 국가 없이도 살아가는 시민이며, 시스템을 거부하고 자신의 규칙을 세우는 창조자다.


질서 없는 자유는 가능한가?


아나키즘은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질서를 탐색하려는 시도다.

게임은 그 실험을 위한 가상의 공간이자, 때론 아주 현실적인 실천의 무대다.


우리는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게임은 우리에게 어떤 자유를 주고 있는가?”

“그 자유는 진짜 자유인가, 혹은 우리가 선택한 착각인가?”


이 질문을 출발점 삼아, 다음 글부터는 본격적으로 게임과 아나키즘이 만나는 접점을 탐험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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